우리 인천시가 곧 있어 인구 300만 시대를 맞게 된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인구수가 299만2천 명으로 다음 달 중순 이후에는 3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며, 이에 대비해 인천시도 조직 강화 등 본격적인 채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인구 300만이 되면 대구를 제치고 서울, 부산에 이어 대한민국 3대 도시가 된다. 인천 인구에 대한 연구서는 2007년 인천학연구원에서 낸 「인천인구사」가 있다. 이 책은 개항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인구 변화를 다루고 있다. 공간적으로는 1883년의 개항지 인구부터 이후 행...
식보(食補)가 약보(藥補)라는 말은 잘 먹으면 그것이 건강을 위해 좋은 약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여름철 무더위에 자칫 잃기 쉬운 건강을 돕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보양식을 찾는다. 보양식이라면 단연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꼽을 것이다. 여기에 단물에서 나는 장어도 높게 치는 보양 음식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장어는 값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제대로 요리를 내는 집도 드물다. 요즘에는 이 같은 전통 보양식 대신에 자기 개성대로 먹을거리를 찾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안면이 있는 한 소기업 사장은 여름철 보양식으로 콩국수...
인천에 여성 전문의원이 개원해 진료를 시작한 것은 1921년 7월 5일이다. 미국 감리교여성해외선교부 소속 여의사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에 의해 중구 율목동 237번지에 부인병원이 개설되면서였다.(율목동 237번지는 현 기독병원의 위치이다.) 이 부인병원 소식은 개원 전날인 7월 4일자 동아일보가 예고한다. "미국 부인전도회에서는 일찍이 여의를 조선에 파견하여 평양에는 광혜여의원, 경성에는 동대문부인병원을 세워 일반부인 환자를 치료하더니 이번에는 다시 인천 율목리 이백삼십칠 번지에 부인병원을 신설하...
인천에서 사라진 옛 지명의 하나가 칠통마당이다. 칠통마당은 현 중구 해안동 하버파크호텔 뒤쪽 선창마당을 이르던 지명이다. 호텔 자리는 과거 경기도경찰국 청사가 있던 곳으로, "경찰국 뒤 해안 일대는 각지에서 실어오는 볏섬을 받아 올리는 칠통마당이라 부르던 선창이었다. 개항 이래 1918년 축항이 준공된 후까지도 번창했었다"고 고(故) 신태범(愼兌範)박사의 저서 「인천 한 세기」는 전한다. 칠통마당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선대 어느 분도 언급이 없어 그렇게 불린 내력을 알 수가 없다. 칠통(七通), 즉 시내에서 이 마당으로 통하...
작년 9월 출간된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을 들추다가 ‘아하!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로켓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로켓에 관한 이야기는 인천에서 있던 엄연한 한국 최초의 사건인데 필진들이 놓쳐 버린 모양이다. 사실 필자는 꼭 10년 전에 ‘남동구에서 쏘아 올린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로켓’이란 제목의 글을 남동구문화원에서 발간하는 한 잡지에 쓴 적이 있다. 이 글을 쓸 때는 여간만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데, 작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책자에는 그만 ...
강원도 산골 사람도, 또 북쪽에 가계(家系)를 둔 월남(越南) 자손도 아닌데 유난히 냉면을 좋아한다. 여름에는 물론이거니와 한겨울에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덜덜 떨며 냉면을 즐긴다. 이러저러 심정이 답답했다가도 이 음식을 한 그릇 하고 나면 씻은 듯이 말끔해진다. 그런데 정통 명물 냉면집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가 인천 냉면의 명줄이 아주 끊어지는 것이나 아닌지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냉면은 평양이 원조라고 하지만 ‘인천 것’을 못 따랐다. 내동 내리예배당 층층대 아래와 그 맞은쪽 평양관 언덕 쪽은 인력거꾼도 가기가 ...
"인천의 선술집도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용동 ‘청대문’은 요즘의 ‘답동관’이나 ‘신포관’에 견줄 게 아니었다. 상투를 튼 안주과장이 산해진미를 모두 통솔했으며, 공평무사하게 손님이 묻는 대로 대답해 응했다. 얌전하고 상냥한 안주인이 손수 목로에 앉아서 그 많은 손님의 복잡한 셈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해내는 수완이 놀라웠다.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는 방법대로 해 줬다. 안주청에 쌓인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 굽든지, 찌든지, 삶든지 자유요, 또 대환영이었다. 술잔과 그 수효에 따라 술값만 내면 그만이었다. 5전은 술과 안주를 포...
엊그제 휴일 북성동 청관(淸館)을 지나치다가 많은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인파는 청요리와 짜장면을 맛보기 위해 온 나들이객들이었다. 인천시민들도 상당수였지만 서울을 비롯한 인근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더 북적였다. 상호 덕분에 유명해진 어느 요리점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청관이라는 것은 과거 우리식으로 이르던 차이나타운의 이름이요, 청요리는 그들이 내는 음식을 칭하던 말이다.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차이나타운보다는 여전히 청관을 더 자연스럽게 입에 올린다. 어쨌거나 그 많은 반점 중에 호떡집은 보이지가 않았다. 우...
우리 인천 선대(先代) 고일(高逸)선생이나 신태범(愼兌範)박사 같은 분들께서 쓰신 글 중에는 재미난 내용이 많이 있다. 특히 이런 일이 다 있었구나 할 만한 흥밋거리 야사(野史)가 눈에 띈다. 여기에 옮기는 ‘박미향의 국제 로맨스’도 그런 류의 이야기로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일단이 전한다. 이야기인즉 1931년 봄께 중국 순양함 해침호(海琛號)가 인천항에 입항했는데, 그 부함장 조수지(曹樹芝) 중교(中校)가 인천 용동권번(龍洞券番) 기생 박미향(朴美香)한테 반해 출항 일자를 늦추며 여러 날 정박해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떠돌던 이야기였는지 모르지만 고일(高逸)선생의 「인천석금」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바로 채동지(蔡同知)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동지는 거구에 아주 뚱뚱했던 사람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인물이 옛 인천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는 35세에 인천에 와서 환갑, 진갑을 지내고 웃터골 부근 현 인천여자중학교 못미쳐 길가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아마 쉰 이상 된 향토인은 유소년 시절에 이 거인을 날마다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