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인천하천살리기추진단이 새롭게 할 일을 찾는 한 해였어요. 내년에는 옹진군과 강화군까지 본격적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갈 계획입니다." 2019년은 인천하천살리기추진단(추진단)에게 여느 때보다도 바쁜 한 해였다. 인천을 ‘물의 도시’로 만들자는 시민 염원을 담아 ‘제8기 하천네트워크’가 출범했고, 생태하천 복원을 위한 방향성 찾기에 몰두했다. 거버넌스로 인천의 물길을 되살리는 추진단의 지난 활동과 내년 구상을 최혜자(50)추진단 사무국장에게 들어봤다. 최 국장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은 것을 올해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대표적
도심의 하수구 역할만 하던 인천 하천은 2003년 7월 29일 준비위원회를 시작으로 9월 26일 민관 합동 인천시하천살리기추진단이 구성되면서 본격적인 하천 살리기가 시작됐다. 2004년 1월 전국 최초로 하천살리기추진단 구성 및 운영조례가 제정되고, 시민단체와 하천 관련 부서 공무원으로 민관 합동사무국을 구성·운영했다. 인천하천살리기추진단은 하천별 복원 목표인 테마 설정을 통해 타 시도 하천에 있는 설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 인천지역 하천의 특성에 맞는 하천을 조성하고자 했다. 유지용수 공급 하천 공간계획 등 징검다리 하나, 풀 한
10년 뒤 인천의 하천 모습은 어떨까. 그동안 10년은 하수구 같았던 하천을 그럭저럭 하천 모습으로 단장한 것에 불과했다. 앞으로의 10년은 문화를 머금은 하천으로 새롭게 변모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10여 년 전 인천시가 내놓았던 ‘인천 하천마스터플랜(2008년)’, ‘어진내(仁川) 300리 물길투어 조성 프로젝트(2010년)’ 등 대규모 하천 살리기 프로젝트는 돈이 없다는 핑계로 조용히 사라지거나 통째로 휴지통에 들어갔다. 하천마스터플랜은 지방하천 19개를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테마하천으로 복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진내 300리
지금의 강화도는 주섬인 강화도를 비롯해 석모도·교동도 등 큰 섬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강화도는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위치하며, 세 개의 강이 합류한 물줄기 중 한 갈래는 강화도 북쪽을 지나 황해로 흘러들고, 북쪽 대안에는 개풍군과 연백군이 위치해 있다. 또 한 줄기는 강화도와 김포시 사이를 남류해 염하(鹽河)를 이룬다.이 염하는 과거 삼남지방의 세곡을 수운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밀물과 썰물 때 조류가 대단히 빨라 선박 통행에 많은 지장을 줬다. 마니산(摩尼山, 469
승기천은 유로가 완전히 달라져 본래의 상태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다. 문학산 북쪽 인근의 얕은 야산인 승기산에서 발원한 승기천은 원래 연수구 선학동과 남동구 남촌동을 타고 논현동에서 바다로 흘러들었다. 지금이야 아파트 숲이지만 승기천은 흡사 갯골 모습이었다. 지금 남동산단 유수지 인근 ‘큰 골’에서 시작되는 갯골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크게 네 갈래로 갈라졌다. ‘큰 골’은 현재 남동유수지 배수펌프장 자리로, 배를 대던 선착장이었다.그 한 줄기는 동춘동 동막과 남동산단 제1근린공원인 부수지 사이를 거쳐 저수지에 닿았다. ‘동막(東幕)
인천시 서구 공촌천은 김포매립지를 가로지르는 배수로였다. 김포매립지는 1998년 2월 25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참석 차 방한한 마이클 잭슨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동아건설산업㈜이 공을 들였던 곳이다.계양산 자락에서 발원한 공촌천은 빈정내(濱長川)를 따라 서해로 맞닿을 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류 폭 200m, 수심 10m로 인천에서 가장 큰 폭의 하천이다. 현재도 공촌천에서는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인천시조정협회가 선수들의 훈련장으로
도심 속의 물길은 사람의 실핏줄과 같아서 메마른 도시에 적당한 물기를 제공하고 오염된 대기에 생기를 불어넣는 바람길 역할을 한다. 또 물고기를 비롯한 수많은 생명의 서식처이자 이동 통로이며, 뜨거워진 도시의 열기를 식혀 주기도 한다. 실제 하천을 끼고 있는 도시 주변은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온도가 1~2℃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때문에 죽어 있는 도심 속 물길을 되살리려는 관심이 높아지는 한편, 시민 휴식처 확보와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해 도심 속 물길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서부간선수로다.1924년 한강수리조합을
"인천지역 청년들이 마냥 모여서 떠들고 꿈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은 있을까, 없을까?"동네에 있는 경로당 수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 수준으로 청년당(靑年堂)을 지었다면 지금 이 같은 물음을 던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청년문화놀이터’라는 용어는 그래서 우리에게 낯설게만 다가온다. 하지만 최근 찾은 청년들을 위한 한 복합문화공간은 예상 외로 정겹고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경로당과 같은 연배의 역사를 지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이곳은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 139-25 일원에 위치한 ‘사담공간 소담’
‘인위(人爲)’는 곧 ‘거짓(僞)’이다. 인간의 개입 자체가 거짓의 뿌리다. 어느 곳, 어느 때 가릴 것 없이 인간의 작위(作爲)는 생산성과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로 받들었다. 섬을 뭉개고 물길을 막아 도시를 건설했다. ‘기계(機械)의 마음’으로 자연을 속여 왔다. 풀려야 할 인간의 삶은 앙상해져 갔다. 기계의 효용성과 생산성은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의 경감에 닿지 않고 해고와 실업을 낳았다. 금욕을 소명으로 하는 자본의 사회는 자연을 거스른 채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켜켜이 쌓는 왜곡시대로 빨려 들었다. 1966년 대한민국 최초
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으매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빚은 그릇은 그 속이 공허해야 그릇 구실을 할 수 있다. 문과 창문을 내어 만든 방은 빔으로 해서 방 노릇을 한다. ‘유(有)’가 이로울 수 있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한사코 ‘채움’을 고집했다. 누군가의 채우는 기쁨은 누군가의 앗기는 아픔의 대가였다. 승기천 상류가 그러했다. 채우고 또 채웠다. 채움의 누적은 마침내 개천의 본성마저 빼앗아 갔다.승기천 상류의 아픔은 1960∼1
"(백인)당신들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팔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땅을 팔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와 빛나는 물은 마땅히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심장 고동 소리를 사랑하듯 우리는 땅을 사랑합니다."1885년 백인들의 대포 앞에 칼과 활로 맞섰던, 끝내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아메리카의 한 인디언이 미국 정부에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모든 것을 사유(私有)와 매매(賣買), 소비(消費)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백인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편지에 새겼다
물은 높은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물은 늘 낮은 곳에 행적을 둔다. 물은 제 물과 네 물로 갈라 놓지 않는다. 서로 부대끼며 섞여서 더 큼을 이룬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비켜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물의 웅덩이에 비록 제 몸을 더럽힐지라도 그냥 건너뛰는 법이 없다. 그렇게 한 점, 한 점의 물방울이 모여 대양(大洋)을 이룬다. 가장 아래에 있는 바다는 가장 위의 하늘빛을 품어 푸르다.인천시와 인천하천살리기추진단이 옛 물길을 찾아서 되살리기에 나섰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물의 본형을 살려서 높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