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사냥을 나와 푸르고 아름다움에 놀라 새로운 나라의 미래와 포부를 빌었던 남양주의 명산 천마산(天摩山). 이 산은 하늘에 걸려 있을 만큼 높다고 해서 ‘천괘산(天掛山)’이라 불리는데(이식, 「영언당기」 참조), 서쪽으로 능선이 뻗어 군장리(群場里, 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르러 팔곡산(八谷山)이 된다.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했던 팔곡산엔 구수영(具壽永) 등 능성구씨(綾城具氏) 6대가 잠들어 있다. 능성구씨 묘역은 조선의 3대 기인(奇人)인 북창(北窓) 정렴(鄭렴)이 가문에 훌륭한 후손이 많아 가문이 잘 될 것이라며 잡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로 권력이 서울 도성에 집중되면서 도시문화가 발달했다. 지배층은 서울 근교에 농장을 마련하고 별서와 선영을 경영했는데, 도성에서 가까운 남양주와 교하 등이 각광을 받았다. 남양주시의 대표적 명산인 천마산과 묘적산의 경계인 차유령(車踰嶺, 현재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자락에 자리한 기계유씨(杞溪兪氏)도 이 같은 경우다. 기계유씨는 유척기(兪拓基)·유언호(兪彦鎬)·유한준(兪漢雋)등 조선 후기 걸출한 관료 학자와 뛰어난 문인을 다수 배출한 명문가다. 특히 유한준은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
사능천(思陵川)이 휘감아 돌고 천마산과 백병산이 두르고 있는 평내동에는 역사인물과 유적이 많다. 이 중 평내동 사천목씨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린 현헌(玄軒) 목세평(睦世枰)을 시조로 한다. 특히 목첨의 셋째 아들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 1575~1638)은 정약용 선생도 높이 평가해 주목받았다.# 청렴(淸廉)의 가문(家門) 사천목씨(泗川睦氏)목세평의 아들 목첨(睦詹)은 평내동 사천목씨를 중흥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 병약해 과거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홀로 옛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과거를 통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조선후기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대표 실학자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보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관병수(公觀倂受)의 실학적 학문자세를 중시했다. 특히 새로운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실(實)’에 대한 탐구 욕구가 강했다. 1765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베이징에 도착하자 곧바로 서양인 선교사 할베르스타인(August von Hallerstein)과 고게이즐(Anton Gogeisl)을 남천주당으로 찾아가 만났으며, 그들과 천주교나 천문학 등 서양 문물에 관해 토론하고
왕숙신도시, 양정역세권 개발 등 남양주는 수도권 거점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대규모 개발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유적들이 사라진다는 아쉬움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양정동은 조선후기를 움직인 역사인물들의 유적이 많기로 유명하다. 용인이씨(龍仁李氏) 묘역도 그 중 하나인데, 숙종대에 좌의정을 지낸 우사(雩沙) 이세백(李世白, 1635~1703), 영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 1669~1745)부자 등이 잠들어 계신다.이의현은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이다. 17세기 후반 문형(文衡)을 잡
남양주시 호평동을 감싼 듯 자리잡은 천마산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이뤄 준다는 산벚나무와 서어나무 연리목을 비롯해 수많은 야생화가 연무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여기에 조선후기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1654~1724) 부자가 잠들어 있다.그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손자이며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후원(崔後遠)에게 입양됐다. 10번 이상 정승으로 임명됐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동생이며, 두 형제
임진왜란, 정유재란, 명청 교체, 일본의 막부 교체 등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사건이 무더기로 쏟아졌던 시기, 이항복은 국제 정세의 한가운데 있었다. 조선 역사서에 이항복은 ‘해학을 잘하고 익살스러웠으며 세상을 가볍게 여기며 즐기는 사람’(선조실록 참조)이란 비난 아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관직생활 26년 동안 병조판서만 5번 역임했고 43세 때 우의정에 오른 이후 20여 년을 정승 자리에 있었다. 뛰어난 문장력과 행정 능력을 갖춰 ‘통재(通才)’로 일컬어지는 우수 관료의 전형이었던 그는 소탈하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정치가로서 호폐제
조선시대 자연과학 분야의 대표적 저술을 꼽으면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가 빠질 수 없다.홍만선은 남양주시 진접지역의 역사인물로, 대중에 많이 알려져 있진 않다. 하지만 그가 지은 「산림경제」는 정약용의 삼농(三農) 사상,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학연의 「종축회통(種畜會通)」 등으로 이어지며 남양주 농학 학술의 전통을 이뤘다. 남양주 농학사가 곧 조선후기 농학 발달의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명문가에 나서 지방관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다홍만선은 1643년(인조 21) 예조 참의를 지낸 홍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산업화 이후 ‘성공’이란 키워드에 매몰되다시피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변화에 뒤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의 삶 이면에는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두려워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나약함이 존재한다. 새삼 남양주시 오남읍 괘라리에서 세상의 온갖 더러운 추태를 멀리하고 고결한 삶을 살다 간 북창(北窓) 정렴(鄭렴, 1506~1549)선생이 그리워진다. 조금 생소한 인물일 수 있지만 그는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 등과 함께 조선시대
남양주시 와부읍 삼패사거리 일대는 조선시대 평구(平邱)라 일컬었다. 지금도 교통의 요지이지만, 당시엔 서울에서 강원도 평해로 가는 대로에서 가장 큰 역인 평구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평구는 조선시대 최고의 세제 개혁인 대동법 등 나라의 미래를 구상했던 지역으로, 이를 주도했던 김육 등 청풍김씨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김육(金堉, 1580~1658)은 자(字)가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손자이며, 성혼(成渾)·이이(李珥)에게 수학한 김흥우(金興宇)의 아들이다.
남양주시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별내동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은 장소로 유명하다.별내동은 과거 ‘샛말’ 또는 ‘화접리(花蝶里)’라고 일컬어진, 꽃과 나비가 많은 아름다운 동네였다. 현재는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옛 자취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화접초등학교가 있어 옛 지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화접리는 조선 중기 이후 천녕 현씨 집성촌이었다. 현수겸(玄壽謙, 1513~1585)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구한말까지 중인(中人) 역관(譯官·현재의 통역관)을 많이 배출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여항
남양주시 진건읍에 모셔진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1334~1390)장군은 원주변씨의 시조이다.변안열의 집안은 원래 고려의 유민이지만 요동 심양에서 태어나 원나라 장수가 됐다. 왕자로 원나라에 있던 공민왕(恭愍王·1330~1374)이 변안열의 능력을 인정해 노국공주(魯國公主·미상~1365)와 고려로 돌아올 때 수행하는 장수로 동행하게 했다.변안열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로 귀화해 무인으로서 무공을 쌓고 이름을 날렸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막는 데 활약했고, 이듬해 다시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몰고 침략해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얼어붙었지만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하늘에 날리는 꽃비는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산책하기 좋고 정상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쾌감도 뛰어나 수도권 시민의 사랑을 받는 수락산(水落山). 남양주시 별내면에 펼쳐진 수락산은 빼어난 경관과 아름다움으로 예로부터 유명했다.수락산이 유명세를 얻은 이유는 생육신이자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 김시습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수락산 산속에 들어와 보니, 흐르는 물이 금빛·옥빛이어라. …. 기이한 두 개의 폭포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윤시동, ‘수락산 동쪽에 금류동·옥류동이
예로부터 서울 근교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는 남양주였고, 그 중에서도 단연 ‘뱅이(현재의 퇴계원)’를 최고로 꼽았다. 문헌상에 토원(兎院), 퇴천(退川), 퇴조원(退朝院), 성곡(星谷), 백양곡(白楊谷), 백양곡(白羊谷) 등 다양하게 등장하는 퇴계원은 왕조의 역사문화 유적과 연관성이 많고,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다. 왕들이 행차하다 쉬어 가거나 크고 작은 군대 사열과 훈련으로 왕실의 위용을 과시하는 곳이었다.(「세종실록」 참조) 심지어 연산군은 사냥터로 삼고 백성들을 내쫓기도 했다.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정약용 선생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긴 우리나라 대표 학자다. 개인 저작으로 동양 최대이며, 분량뿐만 아니라 수준에 있어서도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슬픔과 역경을 책으로 이기다정약용은 4세부터 글을 배워 7세 때 첫 작품을 짓기 시작했다. 10세에 첫 문집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사랑하던 어머니를 9세에 잃고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소리 내어 책을 읽고 글 짓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지은 글을 쌓으니 자신의 키만큼이나 돼 이룬 결과였다.(정규영, 「사암선생년보」 중에서)
정약용 선생은 평생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열수((洌水: 한강의 옛 이름이자 자신의 고향인 남양주를 둘러 흐르는 한강을 일컫는 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람은 자신이 나고 사는 산수를 닮는다고 했다.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큰 강을 이뤄 서해로 흘러가듯 서로 다른 학술을 회합해 새로운 학문을 이뤄 다음 세대에 전해준 열수 정약용부터 국가의 위기를 맞아 평탄한 관직을 그만두고 모든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창설에 희사해 민족독립운동을 추동한 이석영 선생. 고려의 충절을 대표하는 불사이군의 변안열, 질곡 많은 역사 속에서 수락산 바위처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