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이 거리는 인천의 명동거리로 불렸어요. 가구점, 양복점 등 다양한 상점들을 찾는 사람들로 꽉 찼었습니다. 지금 경동구역 재개발이 된다고 하는데 최소한 그때까지는 이 자리를 지켜야죠." 고영복(67)인천만물(중구 개항로 86) 사장은 올해로 30년째 인천의 명동에서 불교·농악용품을 파는 자신의 가게를 지켰다. 주변 가구점, 양복점 등 점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아직 인천만물을 찾는 단골손님이 있어 떠날 생각이 없다. 그는 "신라·한미·인성양복점 등 양복 맞추러 오는 사람들이 1970∼80년대 이 거리를 전...
유명한 노포(오래된 가게)의 공통점은 ‘대를 잇는다’는 것이다. 보통 2~3대만 가도 유명세를 탄다. 그러나 그 유명세는 단지 인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진정한 노포의 조건은 ‘장인정신’이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 대룡시장에 가면 보기 드물게 곧 4대가 물려받을 노포가 있다. 바로 ‘고기가 맛있는 집’으로 소문난 ‘연안정육점’이다.연안정육점의 시작은 한국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최성호(55)사장의 ...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 피란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 지금은 교동대교가 놓이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강화 교동도. 북한과 지척인 교동에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교동주민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머리를 단정하게 만든 장인이 있다. 바로 1965년 교동 대룡시장 한편에 ‘교동이발관’을 창업한 황해도 연백 출신의 지광식(79) 사장이다. 지 사장은 한국전쟁 때 피란을 와 교동에 정착했다. 피란민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워 이발소 조수로 들어갔다. 당시 황재하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이발관에서 일했는데, 지 사장은 여기서 어깨너...
1960년 인천시 중구 신포국제시장 일대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인천시청과 인천지방법원을 비롯해 문화시설과 공공기관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언제나 사람들이 몰린다. 바쁜 시간을 쪼개 식사를 해결하는 이들은 배달 주문을 해 배달 자전거 바퀴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다. 하루에 우동과 짜장면을 600그릇씩 팔고 직원을 7명씩 부리던 시절 신신옥의 이야기다. 신신옥이란 이름은 초대 창업주인 고(故) 박관옥 사장의 고향 황해도 신천군에서 따왔다. 박관옥 사장은 한국전쟁을 피해 제주도에 정착했다가 신포국제시장에 실향민들이 많이 모...
좁게는 동인천 일대, 넓게는 인천지역에서 ‘대동집 아들’로 불리는 이가 있다. 인천시 중구 인현동 대동(大東)학생백화점 2대 경영주인 전승호(55)사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아버지 가게인 문방구에 친구들이 놀러 오면 1960년대 당시 귀했던 연필 한 자루를 그들의 손에 쥐어 줄 수 있었다. 1993년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 반도체연구원으로 재직하던 그는 가업을 물려받았다. 창업주이자 아버지인 전영태(82)1대 사장과 함께 작은 문방구를 관공서와 학교, 기업체 납품 전문 문구업체로 길러냈...
북한과 맞닿아 있는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에는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긴 ‘대룡시장’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넘어왔던 피란민들이 휴전되는 바람에 귀향하지 못하고 머무르다 만든 시장이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시장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이를,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대룡시장 옆을 50여 년간 지킨 ‘대풍식당’ 역시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 한편에 자리잡고 있을 터다. # 대룡리의 전성기를 함께 한 식당 대풍식당의 시작은 1960년대 후반 문을 연 ‘대풍옥’이다. 황해도 연백 출신의 실...
김명주(87·여)씨는 요즘도 가게에 나와 물건들의 개수를 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둘째 아들에게 운영을 맡겼음에도 자전거가 몇 대 있는지, 매장에 진열된 자전거 관련 물건들이 없어진 것은 아닌지 확인한다. 하지만 김 씨는 그 물건들이 얼마나 들어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의 행동은 수십 년 동안 남편 없이 홀로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성안상회를 끌고 나가야 했던 억척스러움의 발로다. 아흔을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의 큰 줄기가 있다. 가끔씩 가게에 나와 물건들을 세는 것과 1951년 1·4후퇴,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다. ...
방앗간은 방아로 곡식을 찧거나 빻는 곳을 말한다. 방아는 곡식 따위를 찧거나 빻는 기구와 설비를 통틀어 이른다. 방아로는 물방아와 디딜방아, 물레방아, 연자방아, 쌍방아, 그리고 기계방아가 있다. 물방아는 방아채의 끝에 홈을 파거나 동이를 달아서 그 속의 물이 차고 비워짐에 따라 방아채가 오르내리도록 한 방아다. 디딜방아는 굵은 나무 한 끝에 공이를 박고 다른 끝을 두 갈래가 나게 해 발로 디딜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공이 아래에 방아확을 파 놓았다. 물레방아는 큰 나무 바퀴와 굴대에 공이를 장치해 바퀴가 돌 때마다 공이가 오...
입구에 늘어진 블라인드를 걷고 손님들이 들어온다. 인천시 강화군 중앙이발관 안의 공제창(64), 공제관(49) 이발사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살갑게 맞이한다. 뒤늦게 줄지어 오는 손님들은 신문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단골손님들로 가득찬 이발소는 금세 서로의 안부를 묻고 농담을 나누며 시끌벅적해진다. 공제창 이발사는 손님에게 가운을 입힌 뒤 서늘한 가위질을 한다. 목덜미와 귀 언저리까지 꼼꼼하게 다듬는다. 벌써 40년째 단골이라는 손님은 "여기는 머리를 너무 조금씩 잘라줘. 한 번에 팍팍 깎아야 가끔 오는...
오래된 것이 각광받는 시대다. 전통성을 갖췄지만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고수들과 오래된 가게들이 언론을 통해 소개된다. 그들의 오래도록 깃든 정성과 소신은 찾는 이들을 열광시킨다. 그 중 남성 전용 공간 ‘바버숍(barbershop)’은 다양한 연령대의 인기를 누린다. 바버숍은 우리말로 이발소(理髮所)다. 흔히 이용원(理容院), 이발관(理髮館), 이용소(理容所)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버숍은 남성들의 발걸음을 독촉한다.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진한 향수와 세련미가 뿜어져 나온다. 인천시 중구 내동에도 40여 년 전통성과 최신...
"60여 년의 전통이라고는 하나 변화의 바람은 우리 역시 막을 수 없는 노릇이야. 중앙시장 점포 대부분은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지. 그런데 조만간 우리 가게 인근이 도시재생을 한다네. 오래된 가게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섭섭하지만 이 역시 변화의 바람이라 수긍해야 하지 않겠나." 그 옛날 인천의 중심지였던 동인천역 일대. 인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삼치골목, 동인천역 북광장, 수문통, 화평동 냉면골목 등 다양한 맛집과 볼거리가 있는 공간이다. 지금도 옛 향수에 젖을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양키시장...
길 영(永), 구할 제(濟)의 의미를 담은 영제한의원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주이자 1대 원장인 노학영 원장은 일제강점기 무의도로 피난을 갔다가 한의학을 공부했다. 생계를 잇기 위한 수단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치료를 해 주고 그 대가로 쌀 한 줌을 받았다. 모두가 궁핍한 시절이었다. 창업주의 의술은 일본의 관료들에게도 소문이 났다. 정치적 관계보다 아픈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는 의료인의 책임이 앞섰다. 영제한의원은 대한민국이 해방된 1945년을 공식적인 경영 시작 연도로 삼았다. 풍수지리에도 능했던 1대...
김현서(73) ‘송미옥’ 2대 사장은 부모님 때부터 해 오던 음식점을 지키고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 기쁘다. 김 사장은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부모님, 동생과 내려와 피란민촌(현 인하대학교 부지)에 자리잡았다. 먹을 게 없어 풀을 뜯어다가 허기를 채우곤 했다. 학익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일거리가 부족해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살이도 녹록지 않았고, 창신초를 졸업한 뒤 바로 인천서중학교로 되돌아왔다. 송미옥의 창업주는 김 사장의 아버지인 고(故) 김종연 씨다. 김 사장이 중학교 3학년 시절 부모님은 평양에서 외식...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충청도 출신 故 김인배 씨(1924년생)는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올라와 종이 장사를 시작했다. 평소 붓글씨와 한지 등 종이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자연스럽게 지물포(紙物鋪) 일을 하게 됐다. 그 무렵 타향살이를 하면서 지게일도 하고 목수일도 해 본 그였지만 종이에 대한 애정이 가장 컸다. 김 씨가 같은 해 인천시 동구 금창동 일원에 ‘한양지업사(紙業社)’를 차린 이유였다. 지업사는 종이를 생산하거나 종이 가공품을 판매하는 조선시대 지전(紙廛)의 후신이었다. 그렇다고 김 씨가 ...
동인천의 번영과 쇠락을 온몸으로 부딪힌 이가 있다. 동인천에서 성신카메라(카메라 점포 겸 사진관)를 운영하는 이준석(74)사장이다. 촬영할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를 꿰뚫던 그의 눈은 백내장이 진행 중이다. 매끄럽게 빠졌던 청년의 손마디는 삶의 풍파를 겪은 70대 남성의 굳은살로 울퉁불퉁해졌다. 오랜 세월 동안 손톱도 꽤나 고생했나 보다. 이 사장은 핏기 없는 회색빛의 두꺼운 손톱으로 덮인 손가락을 굽혀 오늘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었다. 많은 사연이 담긴 듯한 그의 신체 일부들은 지금의 동인천과 닮아 있었다. # 벽안(碧...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각종 건어물들이 정겹다. 말린 생선부터 쥐포, 생선머리, 오징어 다리까지 선반을 차곡차곡 메운 모양새가 주인장의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대형 마트에 가면 어느 한 코너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을 법한 물건들이 이곳에서는 주인공이다. 단골들은 여느 때처럼 이곳에 들러 주인장에게 좋은 물건을 추천받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우연히 길을 지나던 아이들에게 생선머리만 가득 담긴 비닐봉투는 낯선 구경거리다. 한참을 구경하다 돌아서는 아이의 손에는 먹기 좋게 잘린 오징어포가 들려 있다. 배다리가 금싸라기 땅...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지나 따뜻하고 나른한 봄에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 무엇일까.’ 3~5월 가장 살이 오동통하게 붙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먹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제철 식(食)재료 또한 궁금하다. ‘주꾸미’를 추천해 본다. 주꾸미는 영양성분 ‘타우린’이 많아 피로 회복이나 숙취 해소에 안성맞춤인 식재료다. 그래서인지 점심 때가 되지도 않은 오전 11시부터 주꾸미 가게에는 전날 거하게 한잔한 중년 남성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몸도 나른하고 매콤한 게 땡기는데 주꾸미 볶음 먹으러 가자...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백석 ‘국수’ 중) 평양냉면을 노래한 백석(1912∼1996)의 담백한 시다. 여기에 이번...
나의 아버지는 도가니탕을 좋아한다. 당신 말로는 고기는 싫은데 도가니는 맛이 있단다. 큰고모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 형제 6남매가 어릴 적 할머니는 집에서 도가니를 삶아 자식들에게 내줬다고 한다. 그때 추억이 기억나서일까. 기억이 가물한 수년 전 삼강설렁탕을 알게 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 당신은 도가니탕이 ‘끝내주는 곳이 있다’며 큰고모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한 그릇에 1만2천 원이었는데, 당시 싼 가격은 아니었다. 고기와 다르게 쫀득쫀득한 식감과 씹을수록 고소한 맛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얼마 전 취재에 ...
인천 신포국제시장의 골목에 있는 노포(老鋪) 성광방앗간 안에는 1956년 개업 당시에 만들어진 간판이 하나 있다. 창업주였던 이건석 사장은 1947년 신포시장 인근에서 성광방앗간을 시작했다. 창업 당시에는 백설기·인절미 등의 떡과 함께 고춧가루, 기름도 함께 파는 전형적인 방앗간이었다. 그 후 1956년 음식 판매를 위한 정식 허가를 받고 현재 가게 자리로 옮겨와 떡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개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판에는 신포동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귀한 말이 적혀 있었다. 바로 ‘터진개’다. 신포동의 옛 이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