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그 정도로 정책이 올바른 방향을 찾거나 민심이 돌아설 상황이 아니었다. 광해군 13년에는 영남 유생 김시추(金是樞) 등 수백 명이 상소를 올려 이이첨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려 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이 소장을 보면 의혹을 가질까봐 양사를 사주해 논핵하며, 심지어는 김시추 등이 “활과 화살을 걸메고 진을 만들어 성에 들어왔다”
준비 없는 전쟁광해군 11년 4월 2일 명나라와 연합해 후금을 공격하러 갔던 강홍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해 먼저 후금의 역관[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후금[虜]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 않을 계획이
광해군 10년은 인목대비의 폐위가 마무리된 뒤 북인의 내부 균열이 가속화된 시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허균의 옥사로, 허균이 이이첨 세력에게 밀려 죽임을 당한 일이다. 허균은 ‘홍길동전’이라는 고전소설로 알려진 바로 그 인물이다. 허균은 계축옥사는 물론 폐모론 때도 권신 이이첨과 같이 보조를 맞추어 왔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아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는 폐모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광해군 8년(1616) 12월 21일 한겨울의 추위를 일거에 날려 버리고 한양, 아니 조선 땅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상소가 당도했다. 그 상소의 주인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대 최고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을 정면으로 겨눴다. 윤선도의 청론(淸論)“신하된 자가 나라의 권력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논의는 종친이나 전현직 관리에게만 의견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있는 각 방(坊 요즘 행정구역으로는 구(區)에 해당)의 방민, 노인, 군인,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들까지 망라되었다. 실로 광범위한 여론조사라고 하겠다. 광범위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유례가 없는 여론몰이였다. 그리고 이 방식은 매우 특이한 연구주제가 될 것이다
사실 광해군대 궁궐공사를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대 후금 관계로 넘어가는 편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내치와 외치의 문제를 고민하기 좋고, 또 그간 광해군대의 업적으로 평가되던 외교관계의 실제를 바로 검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보아 광해군대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위 후부터 광해군 5년(1613)까지, 광해군 5년에서 광해군
각 도(道)에서 올려보내는 공사 자재와 공명첩(空名帖)을 팔아 모은 공사대금 등 궁궐공사는 말 그대로 온 나라의 재정을 쥐어짜면서 이루어졌다. 이제는 광해군 후반대, 대략 광해군 9년부터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이 사안을 정리해 보자. 그 사안들을 미리 정리해 두면 다음과 같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대비의 자리에서 쫓아내자는 폐모론(廢母論)
부족한 궁궐공사 비용을 백성들에게 수탈하기 위해 각지에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 일을 맡을 관원도 뽑기 힘들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관료집단의 풀(pool)이 되는 당색을 정치에서 배제했기 때문에 사람이 없었다. 결국 한량·무뢰배 등 아무나 끌어다 조도사와 독운(督運) 별장을 맡기게 됐다. 그들의 행패로 곳곳에서 민원(民怨)이 들
궁궐공사 비용은 백성들에게 결포(結布)를 받아 해결했다. 토지를 가지고 있는 소유주에게 세금 외에 별도로 포를 받는 것이다. 일종의 추가 세금이었다. 광해군은 경외의 조공목포(助工木布)를 되도록 속히 납부하도록 독촉해 제때 보충해 쓸 수 있도록 하라고 다그쳤다. 각 도에서 올려 보낸 이 재원을 ‘조공미’·‘조공목
광해군의 지대한 관심에도 궁궐공사는 역시 재정이 문제였다. 각 도에 배정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당시에 무슨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것도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무 관청인 선수도감인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즉위 초부터 계속된 공사에 물력(物力)이 모두 고갈돼 가는 상태였다.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는 재원 조달 방법
창경궁 공사를 비롯한 전각 공사는 계속되었다. 계축옥사 등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궁궐 공사가 1차 관심 사안은 되지 못했지만, 옥사가 마무리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광해군 5년에는 창덕궁의 군영(軍營)을 영건했다. 역마군영(驛馬軍營)을 남군영(南軍營)으로 옮기고 남군영은 내원(內苑) 앞 옛 터에 다시 지었다. 이번에는 궁궐 공사 때 광해군이 보인 풍수
선조 때 이미 수리를 마쳤던 창덕궁을 놓아 두고 광해군 원년 10월 궁궐 영건청(宮闕營建廳)에서는 창경궁 수리에 들어갔다. 거기에 필요한 목재·돌·철·기와 등은 전국에서 모았지만, 특히 하삼도(下三道)가 그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사간원의 직언대로 지금은 백성들이 쉴 때이지 궁궐공사를 벌여 전란에 시달렸던 민생을 다시 물
궁궐은 국왕이 살던 곳이다. 그런데 국왕은 자연인일 뿐 아니라 국왕 자체가 시스템이고 제도이다. 자연인인 국왕의 거주공간으로만 보면 보통 사람과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국왕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제도였기 때문에, 국왕이 사는 궁궐은 제도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기 마련이었다. 국왕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각급 관청, 예를 들어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內
사람은 집에서 산다. 집은 문명의 표현이다. 동굴이나 나무 위가 아닌 자신이 추위나 비바람 등 자연의 불편에서 보호받고 다른 동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작위(作爲)이자 계획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발생은 계급과 신분을 함께 만들었고, 집은 일차적 실용 외에 바로 그 계급과 신분을 반영하는 외적 표현이 됐다
어언 2년 동안 연재가 지속된 셈인데, 그간 나에게 전화를 걸거나 메일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어떤 분은 이런저런 내용이 재미있어 메일을 보내기도 했고, 어떤 분은 집안 조상이 나온다며 연락을 주시기도 했다. 이런 교감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글은 읽기 위해 쓰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견해가 같고 다르고는 다음 문제다. 서로 교감하면서 이해가 싹트고
실록 편찬을 마치고 베푼 세초연이 광해군 9년 9월로 정해졌다. 원래 실록 편찬은 8년에 마쳤는데, 그때부터 서궁(西宮)에 유폐돼 있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론(廢位論)이 전개됐고, 인목대비의 폐위가 있기 전에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에 대한 추형(追刑), 즉 부관참시가 있었다. 광해군 8년 7월이었다. 편찬이 늦어진 실록은 각 사고(史庫)로 옮겨 보관하는
실록 편찬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로 첫째, 임진왜란으로 인한 자료의 유실을 들었다. 둘째, 편찬에 참여하는 관료들의 불성실성이 있었다. 사실 둘째 요인은 어느 시대에나 다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광해군대 실록 편찬이 늦어지는 데 대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경연과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옥사(獄事)와 연관이 있다면 광해군대의 특수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 초반의 정부(政府), 그때 말로 하면 조정(朝廷)은 북인이 중심이기는 했지만 서인·남인이 함께 공존하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소북(小北)이 약해지고 몇몇 옥사가 진행되면서 서인과 남인은 자의든 타의든 조정을 떠나야 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 죽게 하고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던 계축옥사였다. 원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 사라지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요인이고, 둘째는 인위적인 요인이다. 홍수로 물에 잠기거나 오랜 시간이 지나며 기록매체인 종이나 비단이 손상되는 것이다(보통 종이는 1천 년, 비단은 500년을 간다고 한다). 전쟁·절도·화재 등으로 기록이 손실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와
지금은 실록 편찬에 대한 상식을 간단히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특히 어떤 기록이 실리는가를 알아보고 있다. 실록 편찬범례가 그걸 잘 보여 준다. 14조인데, 7조는 대간의 논계에 대한 내용이라 6조와 합쳐 소개했고, 12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번잡하고 쓸 데 없는 문자는 참작해 다듬어서 간결하고 압축적인 문장이 되도록 힘쓴다.”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