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대성당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이 문의 아치형 길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나약한 인간들이 즐거움의 쾌락에 중독되지 말고 고통에 굴복해 주저앉지 말기를 바라는 기원이면서 오로지 영원한 것은 신심이기에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신앙만은 강건하게 새겨두라는 뜻일 것이다.코로나19로 우리나라도 상황이 어려워졌다. 확진자가 나오거나 다녀간 장소는 폐쇄한 곳도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임 취소나 무한 연기는 물론이고 소비가 위축돼 자영업하는
사람의 존엄성과 인격은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 정의·평화·생명의 세계를 이루는 일에 손잡고 함께하자는 목적으로 모인 여성단체에 발을 디딘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긴 세월의 퇴적에 안심이 될 만큼 역할을 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래도 모태의 여성성이 갖는 생명의 바람으로 세상을 향해 민들레 홀씨 하나는 퍼뜨리지 않았을까 자문해 본다.여성 남성의 역할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제도적 차별과 평등을 논할 때면 여전히 예민한 논제가 되고, 성의 역차별이라고 남성 쪽에서 반기를 들기도 하
장수동 은행나무가 만개를 준비 중이다. 스민 노란빛이 햇살에 투명해지는 꼭대기부터 조근조근 가을색을 입는다. 수령 800년을 너끈히 살아낸 장수동 은행나무의 위용은 황금빛으로 잎이 빛날 때다. 길어봤자 100년이 아득한 우리네 한 생은 가뭇없이 사그라지는데 800번의 가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장수동 은행나무는 건재하다. 오래 살아 경외심으로 바라보는 노거수가 전국에 수십 그루가 있을 테지만 은행나무는 특별하다. 가을의 운치를 담당하는 역할로 은행나무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다. 전영우 국민대 명예교수가 신동아에 기고한 ‘미국 최고령
‘침묵 4′33″’은 존 케이지가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연주곡이다. 1952년에 뉴욕 우드스탁 타운홀에서 초연될 당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터는 피아노의 뚜껑을 닫음으로써 연주의 시작을 알렸고 피아노 뚜껑을 여는 것으로 연주의 끝을 알렸다. 1악장 33초, 2악장 2분 40초, 3악장 1분 20초, 도합 4분 33초의 연주 시간을 가진 악보는 침묵을 나타내는 TACET만 적혀있고 음표가 없었다. 작곡가 존 케이지는 4분 33초 동안 피아노뿐만 아니라 어떤 악기도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4분 33초 동안 청중은 조심스러운
눈을 마주보고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있나? 근래에는 기억이 없다. 상대방과 눈을 맞춰 보는 3분은커녕 30초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유아기 아기를 키우는 엄마로 돌아가 보면 아기와 눈을 맞추는 엄마가 보인다. 옹알이에 미소에 웃음소리에 엄마는 아기의 눈빛과 한정 없는 사랑을 나눈다. 세월에 고목의 껍질처럼 굳어진 감성은 눈을 맞추며 마음을 전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았다. 무한한 관심과 배려가 사랑 속에 녹아든 시절이 다시 올까 싶어서 눈맞춤을 시도해 본다. 기분 좋은 파동을 기대해 보지만 서로 어색해 머쓱해진다. 한...
무더위에 체력도 마음도 지쳐 몸의 면역체계에 이상이 왔다. 두세 곳 병원 진료를 받고 한약을 지어먹고 식탁에 건강을 우선한 음식을 차렸다. 성가시다. 세상의 공은 허투로 얻어지는 법이 없다. 마음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면 공항을 찾아간다. 출국과 입국의 소란을 보고 있으면 가고 오는 일이 유별나 보이지 않아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부산스러운 공항이 마음 위로 장소라고 하면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템플스테이든 기도원이든 또 다른 어느 곳이든, 사람마다 마음 수양의 장소는 다 다를 것이기에 공항 나들이를 멋쩍어 하지 않아도 될 것...
호기심이 먼저인 눈빛들이 수도원을 헤집고 다녔다. 세월에 깊어져 거무스름해진 돌벽과 바랜 기왓장은 와글거리는 순례객이 못마땅했을 것 같다. 참배의 마음이라 하기엔 관람객이 너무 많았다. 6천만 년도 더 전에 바다 밑바닥이 솟구쳤다. 솟구친 땅은 비바람과 햇빛과 냉기와 폭염에 깎이고 닳아지면서 장엄한 바위 봉우리를 만들었다. 풍경은 신의 영역이 됐다. 수사들이 찾아들어 수도원을 지었다. 사다리와 그물망이 세상과의 통로였다. 발아래 땅에서는 줄 하나에 구원을 매달았을 것이다. 기도와 금식과 순종과 청빈은 익숙한 세상이 아니다. 성...
만년필로 꾹꾹 눌러 가슴에 새기듯 시를 썼던 자존심으로 버티는 거야. 가난한 그것도 가장 가난한 직업이 시인이라고 떡하니 공개를 했더라고. 노시인의 눈빛에 맑은 정기가 가득한데 몸은 이곳저곳이 재난 발생이라 근심거리가 됐다고 한다. 병원비 댈 방도가 없어서 평생을 글쟁이로 살아온 처지가 민망할 지경이라며 모지리지 모지리야, 자조 섞인 말에 가슴이 저려왔다. 내 주변의 글 쓰는 작가들 중에서 원고료나 저작권료로 생활이 가능한 작가를 거의 보지 못했다. 어느 분야든 상위 10%가 독식하는 구조라고 한다지만 글 쓰는 작가의 경우에는...
계절의 여왕이라고 칭송받을 만한 5월이다. 피어난 꽃들로 온 나라가 꽃대궐이고 온화한 햇살과 결 고운 바람마저도 사랑스러운 날씨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부부의날까지 가정의 달 5월에는 기념일이 많다.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천진한 열 살의 내가 보이고, 은밀한 금지와 구속에서 풀려날 성년의날을 기다리는 풋사과 같은 스무 살의 내가 보이고, 헤어지는 시간 없이 평생 꽃길만 걷자던 동갑내기 부부인 서른 살의 내가 보이고, 엄마 편 듬직한 아들과 나폴나폴 노란 팬지꽃 같은 딸아이가 건넨 ‘엄마 사랑해요’ ...
그 할아버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28번 걸었다. 할아버지는 순례자들에게 말했다. "인생은 선물이다. 그렇고 그런 선물이 아닌 아름다운 선물이다"라고. 길 위에서 만난 순례자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전도한 할아버지는 암으로 아내를 잃었고 자신도 암 환자였다. TV 예능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을 보다가 어느 순례자가 전해준 이야기에 숙연해졌다. 보통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피렌체산맥을 넘어 스페인 서쪽 산티아고 데 콤보스텔라를 도착점으로 800㎞쯤을 걷는 순례길은 가슴을 할퀴는 아픔도, 죽이고 싶을 만큼의 미움도, 터질 것 같은 분노...
소멸로 끝나지 않고 절정으로 피어나는 죽음도 있다. 우리에게 디디에 세스테벤스라는 이름보다 한국 이름 지정환 신부님으로 더 익숙한 신부님의 영면 소식에 문득 든 생각이다. 선한 색감으로 물들인 인연이 우연이 아님을 말씀하신 신부님은 본인의 영결식에 노사연의 ‘만남’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셨다. 벨기에 브뤼셀의 귀족 가문의 막내로 태어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 땅에 정착한 신부님은 그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에 인연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신부님이 부산항으로 입국한 1959년이면 우리는 전쟁의 상흔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가 그린 그림 속에는 웃음 소리가 가득하다. 아기부터 노인까지 시름없는 밝은 웃음으로 캔버스를 채운다. 목젖까지 웃는 얼굴이 화면 가득 행복해 보는 사람도 행복해진다. 그림 속 웃는 얼굴을 닮은 이순구 화백이 좋다. 밝게 천진하게 웃어 본 적이 언제인가 싶을 만큼 세상은 복잡하고 나도 너도 그들도 세상속에서 복잡하다. 몸의 통증도 늘어가고 마음의 통증도 깊어가는 세월이다. 들어보면 너의 통증도 수북하다. 통증을 다스릴 내공이 얕아 속이 보이고 곁이 까칠해진다. 목젖이 다 보이도록 웃...
"나이는 많은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문득 이 문구가 떠올랐다. 의인화된 도둑이 훔쳐가는 것에 생명까지도 포함이라 노쇠해지면 생의 전부를 잃는 것이 순리이다. 혹시 치매인가 싶은 건망증이 늘어가고 호기심이 없어지니 세상이 시큰둥하고 무릎관절이 아파 움직이고 걷는 일이 성가셔지니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혼자 시간은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환절기 탓인지 부고 소식도 많아 죽음에 관한 생각이 진지해진다. 입춘은 한참 더 전이었고 경칩을 지났으면 곧장 춘분인데 여태 두꺼운 겨울...
블로그도 페이스북도 심지어 카카오스토리도 하지 않는 아날로그로 살아서인지 내 개인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다. 그러면서도 여행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아 타인의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 각양각색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여행에 공간적 시간적 감성을 공유한다. 읽는 재미도 있고 유익한 정보가 무궁해 여행지에 대한 도움을 받을 때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나도 인터넷에 여행기를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을 따라가는 실천이 느려 미루고 미루다 ...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어떻게 이동할까? 유치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의인화한 씨앗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씨앗의 여행은 재미있는 동화가 되어 인기가 있었고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씨앗의 여정에 몰입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토양은 종자은행’이란 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이야기 속의 상상이 국립생태원 이효혜미 선임연구원의 글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있었다. 아이에게 들려줬던 씨앗의 여행은 여러 버전으로 시리즈를 만들 만큼 인기가 좋았는데 선임연구원의 글을 읽으니 자연의 생명 여정이 경이로워 생...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은 가속으로 점점 빨라진다. 살아온 연식에 비례해 굼뜬 몸과 귀찮음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무수한 말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세월의 질주다. 감속 절대 없는 가속으로 세월의 속도에 업혀서 부지불식간에 또 한 해가 시작됐고 한 주가 가뿐하게 지나갔다. 새해가 시작되면 올해의 휴일 일수가 며칠이나 되는지 친절한 매스컴은 부록까지 끼워서 안내를 한다. 1월, 새해 첫 달의 휴일은 아쉽게도 신정 1일 단 하루였다. 휴일이 이어질 것 같으면 요일 하나쯤 희생해서 생기는 휴일 날짜를 세어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일탈에서 쉼을...
그해에 거대한 변혁이 있었다. 2014년 신년 벽두,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일로 새해를 시작한 해다.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지번이 도로명이라는 새 주소로 변경되면서 찬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효율성과 편리성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인지 없이 새 이름을 단 도로명은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적응할 필요한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도로명 주소가 대세가 됐고 익숙해지고 나니 편리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도로명 주소의 시작이 1666년 런던 대화재로 도시가 전소되다시피 했을 때 런던을 재건하면서 도로...
시대의 지성으로 보통사람들에게 지적 유희를 즐기게 해 줬던 이어령 님의 글 ‘증언하는 캘린더’ 중에 나오는 문장이다. "마지막 달력 장 앞에 선다. 회환과도 같은 바람이 분다. 한 해의 시간들이 얼어붙는다. 12월. 12월은 빙화(氷花)처럼 결정(結晶)한다.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결정의 달! 1월의 기대와 2, 3월의 준비와 4월의 발열과 5, 6월의 소란과 소나기와 같던 7월의 폭력과 그리고 8월과 9월의 허탈, 불안한 10월과 여백 같은 정체의 11월, 한 해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 결정하는 12월 속에 우리는 서 있다." ...
올 한 해도 어스름으로 접어든 시간이다. 어둠이 짙어져 밤이 깊어지면 또 한 해를 맞이할 여명을 기다리게 된다. 쾌활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으로 기억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지만 세상의 촉감은 자주 바뀐다. 올 한 해는 친정 모친의 노환으로 몸도 마음도 아프고 힘들었다. 어머니 떠나고 난 후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것은 아닌가. 간병에 지치면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먹은 나이만큼 몸도 삭았는지 오가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과부하 온 몸이 자주 아팠다. 그래도 엄마를 보고 오면 마음이 편하고 까실한 엄마의 손을 잡고 있으면...
일찌감치 송년 모임을 하자고 모였다. 마음 어수선하고 번잡스러운 12월보다는 덜 분주한 11월에 미리 송년모임을 하기로 했다. 맛난 음식점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기엔 시끄러운 곳이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자기네 집으로 가자 했다. 향 좋은 차가 있다며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자숙할 일도 있을 것이고 축하나 격려를 할 일도 있을 테니 차분한 티타임을 갖자는 말에 모두 동의했다. 지인이 타 준 차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과식한 배를 쓰다듬어 속이 편해졌다. 나른한 포만감을 즐기는 티타임이 좋았다. 올 한 해를 보낸 소감을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