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식당의 69년 세월은 가난을 견뎌내고 가족을 일군 ‘어머니의 역사’다. 1927년생인 창업주 정진순 씨는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뒤 생계를 잇기 위해 음식 장사를 시작했다. 감자탕을 머리에 인 채 부둣가 판자촌이 즐비했던 인천시 동구 전도관과 하인천(지금의 인천역) 일대를 오갔다. 길거리에서 안줏거리를 팔다 1951년 지금의 아트플랫폼 터에 간판을 올린 것이 춘천식당의 모태인 춘천집이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1대 사장은 손님과 가족처럼 지내며 아낌없이 베풀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감자탕과 복국, 물텀벙이, 꼼장어, ...
1954년 인천시 중구의 한 길목에 최초로 항도백화점이 들어섰다. 1961년에는 이 길목에 인천 최초로 신호등이 켜졌다. 인천의 최초가 깃들고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였던 이 길목이 바로 ‘싸리재(경동)’이다. 싸리재는 중구 경동사거리에서 배다리로 가는 길목이다. 예전 고갯마루에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재 거리’라 불리기도 했고, ‘축현(杻峴)’으로 쓰였다. 싸리재는 부천을 지나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다. 당시 싸리재의 명성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싸리재 길은 1900년 이전에 세워진 애관극장(협률사)에서 한국 최고의 연극과 공연들...
‘풍미(風味, 음식의 고상한 맛)’를 4대째 이어오는 곳이 있다.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 중화요릿집 풍미(豊美)다. 처음 문을 연 건 지금 사장인 한현수(40)씨의 할아버지다. 현수 씨의 증조할아버지인 봉명 씨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 자리에서 ‘동순동(同順東)’이라는 무역회사를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봉명 씨 아들 성전 씨만 지금의 풍미 자리로 돌아왔다. 이때가 1953년. 한 씨 집안의 중화요릿집이 탄생했다. 풍미는 현수 씨의 증조할아버지 봉명 씨가 지은 이름이다. ‘풍미가게’, ‘풍미원’, ‘풍미교자관’ 등으로 이름...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1953년, 도시는 산산이 조각난 삶을 다시 추슬렀다. 관공서를 비롯한 유관기관은 일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이 휩쓸고 간 시골 한구석, 강화로 출근하는 직원들의 끼니를 해결해 줄 식당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강화는 외딴섬이었다. 김포를 잇는 다리조차 없던 터라 섬 바깥으로 나가서 식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시절 강화군의 ‘우리옥’은 군청과 경찰서, 교육청, 문화원 등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점심 한 끼를 차려 주면서 입소문을 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손님들은 어머니의 손...
저는 김상자입니다. 올해 여든네 살이죠. 한평생을 구멍가게에서 살아온 제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겠다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네요. 제 고향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입니다. 1957∼58년 무렵이었죠. 서울로 올라왔다가 약혼자에게 큰 시련을 겪고 스무 살 초반에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으로 건너왔죠. 작은아버지께서는 숭의동에 생긴 ‘자유극장’에 인맥이 있었죠. 작은아버지는 극장 매점을 하던 분과 친했거든요. 작은아버지가 ‘아무개 누나야. 우리 상자 매점에서 일 좀 시켜줘라.’ 이렇게 계속 부탁하신 거죠. 그래서 자유극장 매점 종업원이 ...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추웠다. 창밖에는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발길을 재촉한다. 저마다 입김을 내뿜으며 곧 사라진다. 인천시 부평구 ‘남창문구백화점’의 바깥 풍경은 늘 그랬다. 1945년 문을 연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리고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출근한 사장님은 청소를 시작한다. # 사연이 깊은 ‘공책’이 전하는 ‘남창문구백화점’ 얘기 아침마다 그를 만난 지 벌써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확히 세어 보진 못했지만 거의 3만 명이 넘는 친구가 이곳 ‘남창문구백화점’에 있습니다...
드르륵 끽끽. 기름칠한 지 오래돼 두어 번 나눠 열어야 하는 미닫이문. 아침 손님을 맞이한 뒤 고요하던 노포의 문이 열린다. "어머, 여기인가 보다. 호구포식당 맞죠? 우리 부부가 여행 다니면서 특색 있는 가게들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여기 오려고 경기도 오산에서 일부러 소래포구를 여행지로 잡았다니까. 운이 좋네요. 장사를 안 하시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무뚝뚝한 사장님은 어서 오라는 한마디 인사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소래포구 인근 유흥가와 고층 아파트 숲 사이 오래된 골목. ...
‘슥슥 삭삭.’ 30㎡ 남짓한 공간을 가위질 소리가 메우기 시작한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부드럽게 쥐고 빗 모양에 맞춰 가위로 잘라내는 손이 분주하다. 이용사에게 온전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긴 손님은 편한 손길에 눈을 감고 여유를 즐긴다. 제법 길이감이 있던 머리카락은 금세 단정한 길이로 정돈된다. 손님의 머리 모양을 이리저리 살핀 이용사는 곧 가위를 내려두고 이용용 칼을 집어 든다. 요즘은 보기 힘든 이용용 칼이 귀 뒤부터 구레나룻, 목 부근까지 거침없이 잔머리를 정리해 나간다. 다시 한 번 거울로 손님의 머리 매무새를 확인...
"3대가 이어서 치과를 해서 그런지 믿음이 가. 다른 치과를 다녔지만 여기만큼 잘 보는 치과는 없어. 원장도 간호사도 모두 친절해. 이빨을 빼는데도 하나도 안 아파." 인천시 동구 송림오거리 한 켠에 자리한 ‘중앙치과의원’. 이곳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 건넨 칭찬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 병원은 환자를 보느라 분주하다. "할아버지 조금 따끔해요"라는 원장의 목소리. 연이어 들리는 치과 치료기기의 요란한 울림. 그리고는 입 안에 솜을 물고 나오는 환자. 3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오롯이 환자만을 위한 ...
요란한 음악이 가게 안의 적막을 깼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가봉한 코트를 입어 보러 온 손님이다. 남자 손님과 양복점 주인은 한참을 서서 어깨, 깃, 품, 기장, 소매, 주머니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남자 손님은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그때마다 양복점 주인의 손은 바빠졌다. 옆에서 여자 손님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여자 손님은 1년 전쯤 아들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 가게를 알게 됐다고 했다. 60대 어머니는 "그때부터 이곳에서 옷을 맞추고 있는데, 아들의 요구를 사장님께서 다 들어주신...
한국전쟁은 인천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 통에 도심 곳곳은 성한 데가 없었다. 그런 인천에 새싹이 돋는다. 1960년대 들어서다. 서서히 사람이 살 만한 동네로 변모한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기폭제가 됐다. 이 계획으로 국가산업단지가 하나 둘 조성되면서 인천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된다.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서민들의 삶은 윤택해졌다. 지역에 사람이 많아지니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5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도심의 상전벽해(桑田碧海) 속에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