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삶은 있을까요? 누구나 그런 삶을 원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삶은 없습니다. 고통과 기쁨이 함께 어우러진 게 삶이니까요. 겨울이 있어야 봄이 있듯 말입니다. 겨울의 혹독함이 있어야 봄의 축제가 가능해집니다. 겨울과도 같은 고통이 싫다고 없애 버리면 그렇게 기다리던 봄의 환희 역시 사라집니다. 그러니 기쁨을 원한다면 고통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야만 합니다. 터널의 끝에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겨울이라는 고통을 화사한 봄의 전주곡으로 만들려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책을 찾는 데 마음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때문인지, 장기간 이어진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전 세계 경제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곳곳에서 장사가 안 된다고 한숨을 내쉬는 분들이 꽤 많으니까요.경제는 정치가 좌우한다고 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날 관련법들을 제때 제정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요즘 여야의 모습에서 그런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이 듭니다. 어떤 뉴스에서도 건강한 입법활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서로를 향한 날 선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들려올 뿐입니다. 정치가 제 갈 길
내가 생각하는 정답과 남이 생각하는 정답이 다를 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자기 합리화’의 사전적 의미는 ‘자책감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이나 심리적 경향’입니다. 그래서 자기 합리화로 자신을 정당화시킨 후에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에게 섭섭함과 분노를 표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 따위는 생길 리가 없겠지요.물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자기 합리화가
미국에 사는 누님 부부가 손녀와 함께 20여 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손녀에게 고국의 추억을 담아주려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함께 어머니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모두 주차장으로 갔는데, 누님만은 묘를 움켜쥐고 머리를 떨군 채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혼잣말로 이렇게 말하면서요."엄마, 나도 벌써 여든이 넘었어요. 이제 곧 만나겠네요. 고맙고 미안해요."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속성상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둘은 알뜰히 사랑했더랍니다. 영원토록 행복을 수놓으며 사랑의 초원에서 살았답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이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서 꿈틀거립니다.그러나 짝이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
물고기가 낚싯줄에 걸리는 이유는 낚싯줄에 매달린 먹이 때문입니다. 먹이는 유혹입니다. 유혹에 넘어간 물고기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 순간 물고기는 죽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인간의 삶도 같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먹이가 자신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만 합니다.무엇이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그물’에 걸리게 하는 걸까요? 대체로 재물욕과 권력욕 그리고 명예욕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욕망이 어느 정도는 충족돼야 행복한 삶을 누리겠지만, 그 욕망이 적정선을 넘어서면 탐욕이 되고, 이 탐욕으로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저보다 두 살 많은 형님은 성격이 활발하고 매사 자신감이 강해서였는지 어릴 때부터 늘 골목대장이었습니다. 몸이 허약했던 저는 그런 형에게 의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어느 날이었습니다. 친척 집 대문 앞에 개 한 마리가 묶여 있었는데, 개 곁을 지나가는 형은 제가 알던 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치 밤도둑이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듯이 형은 겁에 질려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인 채로 걸었습니다. 형의 그런 모습이 무척 의아했고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나중에 어머니에게서 설명을
옷에는 필요한 물건을 넣어두는 주머니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주머니가 없는 옷이 있습니다. 바로 수의입니다. 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을까요?지인이 보내준 글 중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나눈 대화가 인상 깊습니다.어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장례식장에는 열 명가량 조문객만 참석했습니다. 그 죽음을 놓고 누군가가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찼습니다."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어, 안됐어."이 말을 들은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사람의 비극은
요즘 뉴스를 달구는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어렵습니다. 전세사기로 인해 세 명이나 소중한 생명을 끊었다는 소식과 당대표 선거 막바지에 300만 원씩이 든 돈 봉투를 돌렸다는 뉴스가 그것입니다."엄마, 2만 원만 보내 주세요. 그렇게 급하지는 않으니 편할 때 입금 바랄게요."고교 졸업 후 곧바로 취업한 청년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모은 돈으로 전세를 살았는데, 이젠 9천만 원의 전세금 모두를 날려버리게 됐으니 얼마나 허망했을까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자 마지막으
얼마나 절망스러웠으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걸까요? 종종 뉴스에서 가족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사람들은 흔히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지 그랬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억지로라도 생각해야만 합니다.「뿌리 깊은 희망」(차동엽)에서 저자는 자살을 결심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한 남자가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업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가진 모든
흔히 ‘배가 불러야 남도 돕게 된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들을 선뜻 돕는 뉴스를 보면서 이 속설이 꼭 맞는 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이런 깨달음을 존 스타인벡의 장편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도 발견합니다. 「내 영혼의 산책」(박원종)에서 저자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소개합니다.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사람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분노하고 슬퍼하며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좌절하면서 무참히 쓰러집니다.친정 식구들과 함께 처량한 유랑민 신세가 돼 서부로 가던 젊은 여인, ‘샤론의 장미’는 길을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무엇 하나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일 테니까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얽히고설켜서 내 뜻대로만 살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일 테니까요.자유는 말 그대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지족(知足)’적이어야 합니다. ‘지족’이란 ‘분수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린’ 것으로 여기고, 없애야 할 ‘적’으로 판단합니다. 그 결과,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돼 세상 곳곳에는 갈등과 분열과 소음으로 가득해졌습니다.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자신과 다른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름’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 내던집니다.세상을 보는 시선이 이렇게 편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심을 잃어버려서 그런 건 아닐까요? 동심은 ‘호기심’이고,
"진정한 희망이란 바로 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행운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나를 신뢰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과 신뢰는 항상 함께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자기 사랑과 자기 신뢰가 성공과 행복이라는 행운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말합니다.성공과 행복은 묘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하면 행복만 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에 실린 인도의 시 한 편이 제 가슴에 묵직한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누가 나에게 옷 한 벌을 빌려주었는데 나는 그 옷을 평생 잘 입었다. 때로는 비를 맞고 햇빛에 색이 변했고 바람에 어깨가 남루해졌다. 때로는 눈물에 소매가 얼룩지고 웃음에 흰 옷깃이 나부끼고 즐거운 놀이를 하느라 단추가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 옷을 잘 입고 이제 주인에게 돌려준다."돈과 권력이나 명예 따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불과합니다. 빌린 옷일 뿐입니다. 죽을 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그것을 하나라
한참을 살고 나서 뒤돌아보면 인생이란 덧없다는 생각에 잠깁니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불태우며 무언가를 이루려고 발버둥쳤지만 그 끝은 늘 허무했고, 의지와는 전혀 다른 길로 걸어왔음을 알고는 후회하기도 했습니다.「한때 소중했던 것들」(이기주)에서 저자는 삶을 자전거 타는 것에 비유해 설명합니다."어린 시절에는 나이 먹는 일이 자전거 타는 법과 엇비슷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몇 번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삶의 페달을 밟으면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자유로우면 행복할까? 자유란 무엇일까? 흔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사회는 무척 혼란스러워지겠지요. 그래서 서양에선 타인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행복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문제훈)에는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이 딸을 낳았을 때의 감회가 나옵니다. 의사는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 않았고, 마침 간호사가 분만 준비를 하러 나간 사이에 아
누구나 꿈을 꿉니다. 그리고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누군가는 꿈꾸던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누군가는 승진하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는데도 어떤 이는 성공하고 어떤 이는 실패합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원인 중 하나는 ‘간절함’입니다.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행동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들이 차곡차곡 쌓일 때 비로소 멀기만 하다고 여겨지던 꿈이 현실로 나타나기 마련이겠죠.어릴 때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꾼 소년이 있었습니다.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조명연·정병덕 저)에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승객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대륙 횡단을 하던 여객기가 기관 고장과 연료 부족으로 사막에 불시착했습니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하나둘 밖으로 나오고, 조종사가 구조 요청을 보내려고 무전기를 두드리지만 아무런 회신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던 식량과 음료수를 아껴 먹으며 구조를 기다리면서 비행기 잔해를 기점으로 여러 명씩 조를 짜서 혹시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마을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조별로 근처를 다니다가 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비행기로 되돌아오곤 했습
"동물의 세계에서 최고의 사냥꾼은 누구일까?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일까, 아니면 가장 힘이 센 동물일까?"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면서 생각에 잠길 때면 가끔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이런 궁금증이 들곤 합니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글이 「고전혁명」(이지성)에 나옵니다.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가는 동물 중 최고의 사냥꾼은 시속 120㎞로 달릴 수 있는 치타도 아니고 동물의 왕인 사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긴 시간을 그렇게 빠른 속도로 계속 달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최고의 사냥꾼은 의외로 리카온이라고 합니다.초원에서 긴 주둥이에 크고 둥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