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때 밀린 글을 처리하느라 두 차례 연재를 쉬었다. 원래 더운 여름에는 경연(經筵)도 쉬었다. 조선시대의 경연은 국왕과 신하들이 공부도 하고 국가정책의 기본방향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 일도 삼복더위에는 쉬었으니 나의 휴가를 양해해주셨으면 한다.우리는 광해군 즉위를 전후로 바뀐 인물들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정권의 변화에 따라 인물의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④‘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天作孼, 猶可違, 自作孼, 不可活]’이란 말이 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서경(書經)’에 은(殷)나라 임금이었던 태갑(太甲)이 했던 말이었다. 하늘이 내리는
지난 호에서 선조가 승하한 뒤 이튿날 즉위식에서 어서 어좌(御座. 임금의 자리)에 오르라던 신하들의 권유를 광해군은 부왕의 시신이 빈전에 있는 상황에서 차마 즉위하지 못하겠다며 광해군은 물리쳤다. 이때 다시 광해군에게 몇 차례나 ‘어서 즉위하시어 만백성의 여망에 부응하시라’고 권유, 광해군이 어좌에 오르게 했던 것이 영의정(領議政) 유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②선조(宣祖)가 2월 1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에 승하한 뒤 이튿날 광해군이 즉위했다. 이튿날이라면? 그렇다. 상중(喪中)이다. 상중에 즉위라….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독자들이 알아두면 좋을 역사 상식을 다소 소홀히 한 듯해 앞으로 조금씩 소개하려고 한다. 얼핏 아는 듯하지만 실제로 잘 모르거나 부정확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①선왕(先王)의 장례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옥사의 당사자가 하필이면 자신의 형인 임해군이었던 광해군. 그렇지만 ‘하필’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 광해군 자신이 상관이 없었다는 가정(심하면 단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변이 나오자마자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가는 등
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⑧광해군 즉위년(1608) 5월 들어 임해군의 옥사는 정리단계에 접어들었다. 추국청의 규모를 줄여 조사단은 삼성추국(三省推鞫. 의금부와 양사 중심의 반역사건조사)으로 바뀌었다. 선조가 승하한 뒤 넉 달을 임해군의 옥사로 흘려보낸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임해군의 옥사를 넉 달 가까이 공부하고 있었다. 이제 그 결말과 의미
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⑦ 반역을 했다는 당사자 임해군은 아예 처음부터 진도로 유배를 보내고, 임해군 궁가의 식솔들을 심문하는 데서 시작된 옥사는 궁가를 드나들었던 무관·한량·종친을 두루 조사, 신문하면서 정리되어 갔다. 진술의 확인을 위해 필요한 모든 신문과 조사가 이루어졌다. 곤장·압슬(壓膝)·낙
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⑥종친들에게 확대된 임해군의 옥사는 고문과 형신이 거듭될수록 임해군에게 불리한 진술이 흘러나왔다. 전에도 말한 바 있듯이, 이 옥사에서 가장 먼저 심문을 받은 사람이 하대겸이었는데, 임해군은 하대겸의 처이모부가 된다. 원래 하대겸은 함경도에 근무하러 갔을 때 처자식을 인천에 두고 갔으므로 한번도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고 진술한
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⑤임해군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은 주로 궁가(宮家. 왕자나 공주의 집을 가리키는 말)에서 부리던 종이나, 전직 무관 또는 현직이라도 하급 지휘관이나 병사들이었다. 주로 발견된 무기도 환도 몇 자루, 활 몇 개 등 소소한 데 불과했다.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나 싶지만, 그래도 의심의 눈으로 보면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④흔히 말하는 신정지초(新政之初),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축복과 기대를 받으며 새로운 임금이 즉위해 정치를 시작하는 처음에 그 임금은 형을 반역의 혐의로 귀양 보내고 추국청을 열어 증거확보에 나섰다. 임해군의 궁가에 살던 노비들은 물론이고, 평소 궁가에 드나들었던 땔나무 장수, 대장장이, 심지어 광대들도 심문의 대상이 됐다.
///'조선 역사의 전복과 전환, 광해군 시대를 읽다' - 5편///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③광해군 즉위년(1608) 2월 1일 선조가 승하한 뒤 보름도 지나지 않은 14일에 임해군은 진도로 귀양을 갔다. 선왕(先王)의 시신이 아직 빈전에 있는 상황에서 옥사가 벌어졌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1. 빈전(殯殿)에 부는 바람 ②지난번 국왕인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이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의 손에 비명횡사했던 사실을 다루었다. 이정표는 5년 뒤 영창대군 살해에도 간여했고, 이후 무관으로 승승장구했다. 사건의 맥락을 보면 광해군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이번에는 임해군 옥사의 시작을 다루고, 앞으로 그 전개&middo
인천사연구소 ‘삼유(三有)’ 모임에서 ‘광해군일기’를 함께 읽으면서, 몇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첫째, 조선시대 사료가 한문으로 돼 있더라도 이미 번역이 나와 있고, 인터넷으로도 쉽게 누구나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겁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 공부에서 시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 사람 사는
지난 호에서 우리는 식민지시대에 시작된 광해군의 부활이 광복 이후에도 받아들여졌음을 살펴보았다. 20세기, 21세기에, 남북한 역사학계에서 다같이, 좌우의 구분 없이 다함께, 나아가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역사인식을 가졌거나 다소 수구적이고 기득권 중심의 역사인식을 가졌거나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이미
# 삼유(三有)가 있기에먼저 머리 숙여 인사드린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경인년 새 아침에 조선 역사의 한복판인 광해군 시대를 집필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조선 역사의 전복과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연히 현재 우리들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도 될 것이다.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