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을 다니다 보면 외부 사람들이 인천을 ‘빈티지’라고 표현해요. 곱씹어 생각해 보면 씁쓸하죠. 우리 인천이 얼마나 낙후된 이미지로 인식되면 그런 얘기가 나올까. 옛것을 살리면서 차별화된 특색을 입히고, 사람이 모여 활기를 띠는 만부마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양순식(53·여)만부마을 주민활동가 대표의 말이다. ‘빈티지(vintage)’란 원래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 해’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오래돼도 새로운 것’ 혹은 ‘오래돼도 가치 있는 것’을 뜻한다. 양 대표는 1970년대 철거민들의...
"재개발은 구역을 다 밀어 버리고 공동주택과 단독주택을 혼합해 상가 등을 함께 짓는 방식이죠. 하지만 도시재생은 있는 상태에서 새롭게 바꿔 쓰는 개념입니다. 낙후된 시설을 조정하고, 우리 만부마을처럼 마을이 자생할 수 있도록 조합도 만들죠. 어떻게 보면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업인 겁니다." 이경찬(60)인천시 남동구 도시관리과장의 말이다. 이 과장은 1993년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올해까지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무원으로 지내왔다. 그리고 지금은 정년을 4개월 앞두고 있다. "토목직인데, 도시재생사업은 과장을 맡으며 ...
"만부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이미 탄탄하게 준비를 마쳤고, 공간 등 여러 조건들이 갖춰져 가고 있어요. 주민들이 중심이 된 만부는 자기 집도 좋아지고, 공간도 좋아지고, 일자리도 생기고, 놀거리도 생기는 그런 마을로 거듭날 것입니다." 인천에서 가장 먼저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시작한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일원에 위치한 ‘만부마을’. 만부마을 도시재생사업을 처음부터 현재까지 주민들과 함께 추진한 이가 있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연락을 해 모실 정도로 주민들이 믿고 따르는 신중진(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만부마을 총괄코디네이터)도...
‘제물포북부역 광장에서 레드락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축구 중계를 볼 수 있다.’ 인천시 미추홀구의 제물포역 활성화(재생)계획 요점이다. 제물포북부역 광장에서 사람들이 어울려 놀고 먹고, 옛 추억을 떠올리고 새 추억을 만드는 공간으로 꾸미는 게 미추홀구 목표다.제물포북부역 레드락은 인천대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치맥’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폭발적 인기는 부평 문화의거리 등에 체인점으로 이어졌다....
# 인천대 이전 이후 상권 쇠락 그리고 1단계 정비 제물포 역세권의 나이 든 건물 외관은 물밀듯 기억을 불러왔다. 골목에서 보냈던 시간과 추억이 담긴 공간, 함께 했던 이들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단 하나 기억의 차이는 거리 위 사람이다. 2009년 인천대학교가 떠나기 직전까지 북적였던 역 주변은 귀갓길을 재촉하는 걸음만 바빴다. 단체손님으로 가득 찼던 금요일 밤 담배골목의 낡은 가게에선 불빛만 새어 나왔다. 십수 년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다는 포차엔 그나마 ‘그때’를 쫓아온 듯한 이들이 종종 오갔다. 청춘이 떠난 골목엔 ...
‘공공 목적을 위해 여러 갈래 길이 모이도록 넓게 만든 마당.’ 사전에 있는 광장의 뜻이다. 우리나라는 ‘촛불혁명’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광장문화를 이룩한 곳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2016년 12월 ‘광장, 환대의 문지방’이라는 주제로 황해미술제를 열기도 했다. 광장이 지천으로 널려 있을 법하지만 그리 많지 않다. 아예 광장이 없는 동네도 있다. 인천시 미추홀구가 그렇다. 안타까움에 미추홀구 직원들은 제물포북부역에 광장을 만들기로 했다. 내년 7월 정도면 완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 중심에 임채익(48)미추홀구 관광문화팀장이 있다...
"제물포 역세권은 터에 대한 원주민들의 애착과 변화에 대한 바람이 큰 곳입니다. 재생의 토양이 충분한 만큼 앞으로 무엇을 구축하고 어떤 것을 채울지 주민들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20여 년 전 제물포에 터를 잡은 류성환(46)씨는 도시재생활동가로서 주민들과 호흡하고 있다. 인하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한 그는 상수도사업본부가 지금 자리에 들어오기 전 그 터에 작업실을 얻어 제물포살이를 시작했다. 류 씨의 작업실은 인천대학교가 송도국제도시로 가면서 한 차례 헐렸고, 서화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또다시 무너졌다. 시립대학교와...
광장이 없는 전철역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역세권이지만 토지의 용도가 최소한 준주거나 상업용지도 아닌 일반주거지역인 곳이 있을까. 80여 개의 초역세권 점포 중 단 2곳만 북새통이고, 나머지 가게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곳이 있을까.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철역 쪽이 아닌 맞은편으로만 초고층 빌딩들이 매일 새로 들어서는 ‘비균형’의 도시. 이곳이 제물포 역세권의 오늘날 풍광이다. 비록 선인학원이 백파 일가(백선엽·백인엽)의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뼈 아픈 시련을 겪었지만 이 초대형 사학 덕분에 제물포역 인근은 반세기...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의 통상 압박은 인천의 어촌마을에도 빠짐없이 가해졌다.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의 한적한 포구는 1883년 개항 이래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開闢)됐다. 일본·중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인들이 앞다퉈 몰려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삽시간에 신문물의 각축장이 됐다. 그렇게 개항장 일대는 ‘제물포(濟物浦)’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제물포는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한 제물포진이나 제물량(濟物梁)에서 그 이름이 등장한다. 제물포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로 비춰 볼 때 이곳의 지명도 ‘거친 맷골(들판...
2013년 4월, 풀 죽었던 오래된 마을에 한순간 생기가 돌았다. 낡고 가난했던 인천시 중구 송월동이 동화마을로 새 단장했다. 적막하고 쓸쓸했던 마을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동화 속 주인공들로 색깔을 입힌 살림집 담벼락과 골목길 조형물은 바깥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과 감성을 움직였다. 송월동 150가구의 변신은 기계가 엮은 네트워크의 문명 속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한 해에는 관광객 100만 명이 송월동 동화마을을 둘러보
이제나저제나 손꼽아 기다렸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송월동이 그렇구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남루하고 초라한 삶에 어깨 펼 날 없었던 송월동 사람들에게 곧 있을 거라는 개발 소식은 희망의 빛줄기였다. 이제 허리 좀 펴겠거니 했던 순간, ‘와르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름져 번들거렸던 개발계획은 송월동 사람들을 일순간 배반했다. 인천역 주변 44만㎡ 규모의 재정비촉진지구가 지정 1년 6개월 만인 2010년 1월 해제됐다. 가뜩이나 없는 자들의 묵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송월동은 나락으...
"종일 지나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손에 꼽을 정도로 한적했던 송월동에 동화마을이라니! 터무니없다는 소리만 들었죠.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동화마을 골목대장’이란 칭호까지 받게 됐어요." 지난 14일 인천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에서 만난 이정선(69)송월동 15통장은 동화마을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첫마디를 꺼냈다. 그는 "2013년 이전 송월동의 모습은 오후 10시께에는 거주하는 주민들도 지나다니길 꺼려 할 정도였다. 허물어져 가는 집과 무너지기 직전의 담벼락이 즐비한 동네는 굉장히 어둡고 음침했다.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이...
송월동 동화마을은 이대로 갈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지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내야 할지, 새로움을 준다면 무엇으로 채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에 그러했듯이 유명세를 탔거나 타고 있는 도시 몇 군데를 기웃거리다가 괜찮다 싶으면 베끼듯 가져다가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언제까지 관(官)이 모든 것을 끌고 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공무원도 예기치 못한 시행착오를 불러올 수 있다. 분명히 한계도 있다. 남들이 생각지도 않은 아이디어를 별안간 왕창 쏟아낼 수 있는 능력도 힘에 부친다. 마을 만들기가...
"어떤 시절에는 ‘화공(畵工)·화백(畵伯)’으로 불린 적도 있고, ‘환쟁이’라고도 불렸다. 요즘은 그냥 ‘동화마을’ 활동가로 웃으면서 젊게 산다." 지난 14일 인천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 활동가’로 활약하는 최명선(67)씨가 자신을 소개하며 멋쩍어 했다. 그는 현재 동화마을 시설관리자다. 2년 전부터 동화마을의 낡거나 색이 바랜 ‘벽화’ 등을 새 작품으로 탄생시키고 있다. 최 씨가 동화마을에 쏟는 애정은 남다르다. 그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동안 월미도 벽화 그리는 일도 맡아서 했다. 이후 개인 작업을 하다 ...
화장(化粧)발로 송월동이 동화마을로 변장한 지 5년이 지났다. 앞으로 다가올 5년, 송월동 동화마을이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 갈지 궁금하다. 따지고 보면 송월동 동화마을의 탄생은 전국적으로 세게 바람 불었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씨앗으로 삼았다. 늙고 지쳐 가는 오래된 마을을 살리는 방편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지붕과 담벼락에 색깔을 입히던 때였다. 자투리 땅만 보이면 조형물로 채우지 못해 안달하던 시절이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긴 곳 또한 송월동 동화마을이다. 송월동 동화마을이 표본으로 받든 곳 중 하나가 먼저 길을 텄던 경남 통...
이 땅 어디엔들 개별성이 묻어나지 않는 곳이 있겠느냐마는 시공(時空)의 자연은 그곳이어야 마땅한 독자성을 그곳에 베풀었다. 산과 바다가 빚어낸 그 언덕배기 갯가 마을의 타고난 운명은 개방성이었다. 자그마한 어촌은 각국의 기선(汽船)이 들끓었다. 세계로 향해 열린 바다의 길목이었다. 동네 가팔막 모퉁이에는 우리나라 길의 새 역사를 쓴 ‘철도(鐵道)’가 놓였다. 그 철길은 왕조의 심장부 서울에 닿았다. 먼 생애들은 이 길들을 따라 들고나면서 그곳에 새것들을 풀었다. 후세는 그것들을 ‘최초(最初)’, ‘최고(最古)’로 이름 새겼다....
일상 속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은 그동안 여물지 않은 채로 위선적이었다. 과학과 현실을 들먹거리며 합리성의 이름으로 거침없이 새것들을 이식했다. 철학과 역사학, 기하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온갖 수사(修辭)로 덧칠한 첨단화를 쉼 없이 잇댔다. 그 공간에서 생애는 자족할 수 없었다. 그 터를 지배한 생명들은 더불어 아늑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가게끔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살수록 풀리고 펴져야 할 생활은 고단하고 쓸쓸했다. 개항 이래 이 땅에 세워진 주택과 빌딩, 마을과 도시들은 자연과 인간을 저버렸다. 옛것의 고결함은...
도시(마을)재생 뉴딜, 더불어마을(인천형 저층주거지 관리사업), 빈집 활용, 골목길 사업, 원도심 활성화 등 ‘재생’ 사업을 부르는 이름은 많다. ‘마을재생’이라는 말은 와 닿지 않는다. 그동안 재개발·재건축 등 모두 부수고 새로 짓는 마을 만들기만 알고 있어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은 마을재생이 무엇인지 헷갈리지만 꽤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있다. 그래도 마을재생의 개념은 분명히 있다. ‘집’의 기능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옛날 우리들의 집에는 여러 기능이 있었다. 독서와 그림을 그리는 서재, 손님...
인천시 동구 화수동(花水洞)은 한 세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동네다. 구(舊)한말 서양 외세에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한 근대 문물의 산실이자 인천 근현대사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동구는 시대 흐름에 밀려 도시개발의 수혜지에서 항상 제외됐다. 이곳의 시간은 말 그대로 1960∼1980년대에 멈춰 섰다. 붉은 색 벽돌로 지은 지 반세기가 넘는 일본식 2층 집들이 아직도 즐비하다. 폐공가로 변해 무너져 내린 담벼락과 집들이 부지기수다. 지역 항만과 부두, 거대한 공장들의 배후주거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과거의 영광은 풍문으로만 들린...
화수부두는 한때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어항(漁港)이었다. 부두의 배후주거지였던 마을은 수산업 호황과 주변 공장들로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점차 쇠락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지금 이곳은 옛 명성을 찾고자 한다. ‘다시, 꽃을 피우는’ 곳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화수정원마을 주민들을 만나 삶의 애환과 미래 모습을 그려 봤다. "옛날에 이곳은 서로 간에 정도 있고 정말 재미있게 살기 좋았지. 전쟁이 끝나고 마을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던 초창기에는 꿀꿀이죽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