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진 대낮을 태우고 운염도로 출사를 갔다. 세상에서 소환한 구름과 더 이상 상실을 만들지 말라는 바람과 함께, 출정하는 병사처럼 결연히 출발했다. 가는 길 내내 피사체가 되어줄 장소와의 대면을 기대하는 마음이 설렜다. 섬 초입부터 칠면초가 지천으로 붉었다. 늦가을 숙연해지는 계절 속에 땅은 메말라가도 붉은 군락이 광활했다. 섬의 땅은 바닷물길이 막혀서 거칠어지고 생채기가 생겨났다. 바다는 우리의 의지로도 잡을 수 없고 그렇게 멀어진 손바닥이었다. 새로 옹알이를 시작한 땅이 하얗게 갈라져 섬의 식물들은 소금 눈물을 빨아올려 ...
새 아기와 아들이 둘이 하나 되는 오늘, 행복한 가족사진을 찍습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서로 닮은 얼굴이 같은 행복을 기억하는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할 때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 거라고 하지요.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주겠다고도 합니다. 비현실은 믿음이 없습니다. 실행하기도 힘들어 기운을 빼고 나면 지칩니다. 그것보다는 지상에 발을 딛고 쌓아 올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노력과 격려가 두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살아보니 사랑도 연습이 필요하더군...
"금자동아 은자동아,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을 준들 너를 사랴." 예전에 할머니들이 아기를 재울 때 부르던 자장가 가사의 일부다. 지역마다 가사 내용이 약간씩 다르기는 해도 아기를 귀히 여기는 마음은 똑같이 담겨 있다. 주말에 백일 된 아기를 데리고 온 부부와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가을 여행을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 숙소 예약이 쉽지 않아 수목원에 있는 황토집을 한 채 빌렸다. 방 2개인 숙소에 5명이 묵기로 했다. 저녁에 아기와 아기 엄마 아빠가 도착할 것이라고 연락이 왔다. 아기가 어려서 장거리 이동이 힘들 것 같다고 ...
추석 연휴 막바지인 일요일 하루 인천공항 입국자가 사상 최대인 11만6천 명이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도 저 엄청난 입국자 중의 한 사람이라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누가 뭐랄 사람이 없는데도 추석 연휴를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처럼 즐긴 것 같아서다. 흔히 50대에서 60대까지를 낀 세대라고 부른다. 조금 압축하자면 오십 중반에서 육십 중반까지로 내 나이대가 포함되는 연령층이다. 낀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 나이대는 전통 가치관을 가진 부모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신세대 자녀를 키웠다.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
추석이 머지 않다. 간소화됐다고는 해도 명절 선물 보내기는 마음에 부담이 온다. 받을 분의 취향을 고려하고 과하지 않은 선에서 선물을 고르기가 간단하지 않다. 옷이나 액세서리, 주방 소품 같은 것은 취향이 다르면 버리지도 못하고 남 주기도 그래서 묵혀두는 일이 생긴다. 언젠가 바자회에 받은 선물들이라며 본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상자에 가득 담아 온 분이 있었다. 정가의 10%도 안 되는 싼값에 처분되는 선물을 보면서 보내는 이도 받는 이도 기분 좋게 주고받을 수 있는 선물이 뭘까 고민이 됐다. 한동안 예쁜 컵이나...
기차를 타 본 지가 참 오랜만이다. 빠름을 찬미하는 무한 속도 시대에 살고 있어서 느린 완행의 낭만보다는 속도전을 숭배하는 세상이라 누구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주는 KTX를 선호한다. 그래서 나도 KTX 표를 예매하고 기차를 탔다. 9월 18일이 철도의날이라는 안내 문구가 보인다. 역순으로 계산해 보니 올해가 우리나라에 철도가 생긴 지 118주년이 된다. 첫 증기기관차 도입이 1899년이다. 까마득하게 오랜 역사다.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독점적이었던 위세가 다양한 이동 수단의 보편화로 약화되기는 했어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아침에 들려온 비보. 가수 조동진 별세 소식이다. 다음 달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조동진의 콘서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도 노랫말도 내 젊은 시절을 함께 했고, 세월 속에 애잔했던 삶의 층층에도 자주 동행해 줬다.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어떤 날’ 등등 몽환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조금은 쓸쓸한 노래에 감정이입이 돼 많이도 들었었다. 폭염이 순해진 계절의 길목에서 그는 급히 떠났고, 우리는 준비 없이 그를 보냈다. 세상의 시간은 자주 우리를 배반...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정정하시고 정갈하신 분이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 계신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 좋았다. 여든 다섯의 연세에도 마음은 소녀 같아서 어머니를 뵈면 곱게 나이 들고 싶다 생각했었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쇠를 박는 수술을 받고 한 달을 누워 꼼짝 못하고 그대로, 그 뒤부터는 재활병원으로 옮겨서 몇 달째 입원 중이시다. 재활치료 덕분에 지금은 휠체어로 병실 바깥나들이도 하고 병원 주변 식당에서 가끔 식사도 하실 만큼 호전되셨다. 친구의 효심이 감동이다. 일을 하는 직장인이라 종일 병간호를 할 ...
축축 늘어지는 폭음 한가운데 연 3일을 집안을 뒤집어 대대적인 정리를 했다. 수년째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모셔둔 물건들을 치우고 나니 시선이 낮아지고 기가 순환할 공간이 생겨나 시원하다. 서랍장, 수납장 구석에 하나 둘 쌓여있는 수건을 보이는 대로 꺼내 모아보니 무려 11장이 나온다. 결혼식, 돌잔치, 승진, 이런 저런 행사장에서 받아온 기념품 수건이다. 기념 수건은 목적에 맞는 이름표와 감사를 달고 제가 있어야 하는 세면장이 아닌 어두운 수납장 칸 안쪽에서 긴 휴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스 포장을 벗기고 수건에 찍혀있는 ...
신춘문예 출신인 박성우 시인의 시 전문이다. 복닥거리는 콩나물시루 안에서 치열하게 생존하려면 갈등이 불거지고 성질도 나게 마련이겠다. 서민으로 치환된 콩나물에서 동류감을 느낀다. 자의로 타의로 만나는 모임이 여럿 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다 보니 추구하는 이념이 각각이라 문제가 생기고 갈등도 보인다. 어디나 센 무리가 있고 중간계와 약자가 존재한다. 특별한 상황도 있지만 성질 제대로 보여주는 측은 참다 참다 폭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유교적 가치관이 유효해서 나이와 직위에 격을 부여해 지도급 인사에게 성숙한 인품을...
교통사고 이후 운전을 하지 않으면서 멀어졌던 라디오를 근래에 다시 듣게 됐다. 적당한 백색소음은 마음을 안정시켜 경직된 신경을 풀어주고 집중도를 높여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서 원고 작업할 때 도움이 된다. 딸아이 방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오디오를 꺼냈다. 아담한 사이즈가 마음에 들어서 글 쓰는 컴퓨터 방 선반에 올려놓았다. CD로 음악도 듣고 FM으로 음악 프로그램도 청취한다. 펑키나 랩 음악이 나에게는 주종목이 아니어서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들었던 팝송이나 발라드의 리듬은 익숙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추억 소환으로 마음...
사람이나 동물이 몸이나 그 일부를 느리게 자꾸 움직이다, 게으르고 굼뜨게 행동하다. 꾸물거리다의 사전적 해석이다. 마음도 단정하지 못해서 빈둥빈둥 보내다, 결정을 못하여 시간을 허비하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해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빨리 빨리가 대세인 시대 흐름에 꾸물거림은 지탄의 대상이다. 속도전에 지친 사람들 중에서 느림을 예찬하며 느림의 미학을 주장하기도 한다. 잠깐 쉼의 시간으로 호응을 하지만 결론은 늘 성과를 좇아야 해서 희망사항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어떻게 사용...
먹방 방송이 대세가 된 것은 오래전이고 요즘은 배부름을 만끽하는 것보다 더 복합적인 다중의 즐거움을 누리는 먹방으로 진화했다. 주방에서 조리하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외식사업은 팽창하고 SNS 같은 사회관계망에는 다양한 먹방의 모습을 보여준다. 넘쳐나는 맛집 정보도 먹방 사진도 집밥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리의 역설이란 말은 「요리를 욕망하다」라는 책을 쓴 마이클 폴란이 한 말이다. 바쁜 현대인들은 식당뿐만 아니라 마트나 편의점 혹은 홈쇼핑 같은 데서 음식을 쉽게 구입한다.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요리에 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처자와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른두 살, 살아온 시간은 신입도 중견도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참을 찾고 싶었다 한다. 풋풋하지도 무르익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라고 했지만 처자는 단단해 보였다.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을 고행으로 걸으며 처자가 길 위에서 경험한 시간들이 빛나 보였다. 종교와 상관없이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라 러시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핀란드 등 출발지가 다양한데 프랑스의 국경도시 생장에서 시작해 피...
치열한 선거전이 끝나고 오늘은 투표 날이다. 대한민국의 영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후보가 무려 열세 분이다. 그 분들이 목이 쉬어라 목청 높인 공약의 진실을 믿고 싶다. 2015년 퇴임한 호세 무히카 전직 우루과이 대통령 이야기는 지도자의 표본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가 호사스러운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 주었다는 파격의 행보도, 거처인 시골 농가에서 손수 운전해서 대통령궁으로 출퇴근을 했다는 일화도 예사롭지 않다. 과거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는 그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손수 운전도 허름한 주거도 ...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을 선망하는 이유가 있다. 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장치가 보장되는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생을 잘 살아가고 마무리할 수 있어서 동경한다. 권력과 부의 차이로 편견의 시선에 속울음을 우는 국민이 없다는 점이 부럽다. 우리나라도 선량한 복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도 국가차원이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복지정책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만인의 평등은 일정량의 재화를 똑같이 나누는 것은 아...
하루에 14대의 한국 비행기가 직항으로 다낭에 들어온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핫한 해외여행지 중의 한 곳이 다낭을 중심으로 한 후에와 호이안 지역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베트남의 국토 중간인 허리가 이 지역이라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전시에는 적의 병력 이동이나 군수물자의 수송을 막을 수 있어서 사수하거나 점령해야 할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던지라 미군의 최대 군사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 지역은 월남전 당시에 파월 청룡부대의 주둔지면서 격전지로 중요한 전선이었던 곳이라 우리에게는 낯선 곳이 아니...
몇 해 전에 여섯 명만 거치면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연결된다는 6단계 법칙으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재미있는 법칙이라서 유명인 한 사람을 정해놓고 나와 몇 단계를 거치면 연이 닿는지 연결고리 찾아가기 게임을 즐겼던 기억이 있다. 좁은 세상 법칙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이 1967년에 사람 사이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한 결과물이다. 보스턴에 살고 있는 한 증권 중개인에게 소포를 전달하는 실험이었는데 출발지는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24시간, 거리로는 2천525km 떨어진 ...
"모든 작가는 자신의 언어로 세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한 자세로 기대어 묵은 잡지를 뒤적이는데 눈에 꽂히는 문구가 있었다. 조건반사처럼 단정하고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세상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 검증하는 마음이 편하질 않다. 글을 써 온 세월이 꽤 쌓였는데도 작가라는 호칭은 여전히 쑥스럽다. 작가는 자신만의 손맛으로 조리한 작품을 독자에게 맛보인다. 입맛은 천차만별이라 호불호 분명한 반응이지만 맛집은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이고 그만그만한 맛을 내 놓는 곳은 평타를 치고 발길 뜸한 곳은 한산하다. 세상의...
마이웨이를 말할 만한 세월을 살았다. 인고의 시간이 억울하다 싶어질 때면 체증이 온 것처럼 명치가 답답해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속절없이 성인군자 코스프레로 마무리하는 자신이 못나 보인 적도 있다. 뒤끝에 힘이 실리지 않으니 실세는 물 건너가고 결론은 무안당한 모양새다. 평화를 위해서라고 거창하게 의미 부여를 하면서 위로를 해 보지만 자존감 존중에는 미덥지 않아서 마음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거칠 것 없이 쏘아 올리지 못한 대신에 세상 어디를 가든지 단정한 인사를 할 수 있기에 위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