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한 마리가 좁은 길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다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과 양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의를 느꼈다. 잠시 후 양은 드러누운 듯한 자세로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나이고 양은 양일까? 양이 또 한 마리 다가오더니 친구 곁에 털을 맞대고 누웠다. 그들은 서로 다 이해한다는, 온유하면서도 즐거운 눈길을 교환했다." 알랭드 드 보통의 여행기 「여행의 기술」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람을 제외한 세상의 소음은 세상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살랑 바람 같아서 태풍이 아니면...
국립국어원에서 펴내는 소식지에 실려 있는 ‘흘러가는 것들에 기대어’라는 문구에 꽂혀서 칩거하고 있던 몸과 마음을 깨워 산책을 나섰다. 한파주의보 내린 날씨는 매섭고 차서 볼살이 아리다. 올 겨울 들어서 최강 한파라는 일기예보가 실감나는 날씨다. 겨울은 겨울답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뒤탈이 없을 터이다. 겨울이 포근하면 웃자란 산천초목이 꽃샘추위에 냉해를 입거나 제철에 맞는 걸음보다 앞질러서 때를 맞추지 못한 사단이 생길 것이고 겨울을 쉽게 넘긴 병충해도 기승을 부려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저 윗선에서 풀어놓은 마당극이 자...
‘할머니가 떠났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생을 마감한 범고래 이야기다. 100년을 넘기고도 5년을 더 살아 105세에 바다 물결 속으로 몸을 뉘어 사라진 암컷 범고래 J2의 인생은 많은 것을 짚어보게 한다. 한 세기를 넘기며 가모(家母)로 무리를 이끌었던 할머니는 안전한 이동 경로를 찾아내고 먹잇감이 풍부한 장소로 식솔들을 이끌어 안전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했다. 미국 고래연구센터에서 지난 40년간 추적 관찰했던 범고래 무리 중에서 할머니 범고래 J2는 돋보이는 존재였다고 ...
메멘토 모리의 뜻은 ‘죽음을 기억하라’다. 모든 끝은 죽음인가. 들뜬 성탄 주말을 마무리할 늦은 심야시간에 KBS방송에서 하는 다큐 ‘죽음’을 시청했다. 예수의 탄생과 부활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계절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매해 빠지지 않고 캐럴 송 흥겨운 대형 쇼핑몰을 다녀오게 된다. 올해는 난해한 시국으로 가라앉은 성탄절과 송년이라 해도 대형 트리는 빛나는 장식 전등과 크리스마스 용품으로 꾸며져 휘황하고 아름다웠다. 사람에 치이고 선물을 고르느라고 지치고 이런 성가신 일들을 해마다 반복하는 일에 피곤해졌다. 아이와 어른들로...
긴 머리를 단정히 묶고 개량한복을 입은 선생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상담자는 마주 앉은 첫 대면에 공손해졌다. "식(食)을 다스리면 만병을 예방할 수 있어요. 당장 몸에 화답하는 음식으로 식단을 바꾸시오." 선생은 진지했고 엄숙했다. 오링테스트를 통해서 진단한 내 체질은 8개 체질 중에서 토음인으로 판정났다. 선생이 권하는 음식과 금해야 하는 음식을 처방했다. 처방한 식단을 보니 금해야 하는 음식을 건강식으로 여겨 먹어왔기에 갈등이 왔다. "몸이 힘들고 피곤한 이유를 알았으면 실천에 옮겨야지요. 남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좋다고 ...
입동(立冬) 지나 소설(小雪) 지나 바람이 차다. 잎 떨어뜨린 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빈 가지인 채 휴면으로 겨울을 나야 하는 시절에 여태 매달린 감들은 선홍빛이다. 시린 하늘이 배경이라 문득 서럽다. 겨울을 이겨내는 인내는 삼라만상이 공통이라 해도 붙박이 식물에겐 고되다. 약한 부분을 고사시켜 잎을 잘라냈지만 다음 해에 생장해야 하는 눈은 두꺼운 비늘 조각으로 품어서 혹한에 대비한다. 땅 위로 찰랑했던 잎과 줄기를 고사시켜도 씨를 남기고 땅속줄기도 알뿌리도 투박한 생명을 잉태해 입춘을 기다린다. 너를 모르는데 나를 엮지 말...
주말에 제주도 곶자왈 탐방을 다녀왔다. 곶자왈은 제주도 방언으로 숲이라는 뜻이다. 더 자세히 풀이하지면 ‘곶’은 숲이고, ‘자왈’은 바위나 자갈 같은 돌을 뜻하는 말이라 돌 위에 형성된 원시림이라 해야 정확하겠다. 제주의 숲은 무분별한 개발로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곶자왈은 겨우 6%뿐이라고 한다. 흙이 없는 이곳에서 초목은 제 방식대로 생을 일구며 존재하고 있었다. 나무의 뿌리는 땅속으로 뻗지를 못해 바위를 감싸고 버티며 근육을 키워 씨름선수의 장딴지처럼 다부져보였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점성이 높은 용암이 제각각의 크기로 ...
소설 쓰는 여류 문인 모임에서 소이작도로 워크숍을 갔다. 써 온 소설 작품들을 합평하고 생각 많은 머리를 좀 쉬어가자고 해서 떠난 섬 나들이였다. 인천 앞바다 섬들은 문인협회에서 자주 워크숍을 여는 장소라 친숙하기도 하고 한두 시간 안에 닿는 고립된 장소가 주는 결속으로 내적 치밀을 쌓기에도 적합해서 들뜬 마음이었다. 아침 일찍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만나 소이작도 행 여객선에 승선했다. 승객이 예상외로 적어서 한산하기는 했지만 늘 그랬듯이 우리는 우리끼리 진지하고 우리끼리 재미있어서 주변 분위기에 둔감했다. 자주 봐서 얼굴이 익은...
‘합리적이다’라고 말할 때의 합리적이다의 의미는 감정의 개입을 자제하고 이성의 힘으로 내린 판단을 뜻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여기에는 공감 능력도 작용을 해서 역지사지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관용도 들어 있으면 좋은데, 명쾌한데다가 때론 차갑기도 해서 허둥거리지 않은 판단이기에 그르치지 않은 판단일 것이란 선입견이 있다. 합리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과 구성 구조에 필요한 법칙이다. 냉정한 법 조항마다 예외 항목들이 들어있는 것은 정상참작이란 공감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 되겠다. 원리원칙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숨통을...
붉은 빛이 도는 소나무 숲에서 바라본 초당의 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에메랄드 빛 하늘은 상쾌해 마음속 묵은 먼지까지 날려버린다. 행글라이더로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쫓아가는 사이에 내 몸도 떠오를 것만 같았다. 여태껏 구속하는 물리적 힘이 없음에도, 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들여짐이 스스로를 옥죈다. 선한 독립이라고 격려를 하지만 그 단초는 예외 없이 용기인 것 같다. 오늘은 좀 파격이고 싶다. 초희는 시인이라 400여 년 전 허초희가 돼 절정을 향해가는 가을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갈 것이고, 그럼 나는 커피 향 ...
9월 13일이 ‘법원의 날’이었다. 이날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사법권을 인양 받은 날이다. 국가의 사법주권을 회복한 1948년 9월 13일을 기념해서 작년에 제정한 기념일로 ‘법원의 날’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실질적인 설립을 기념함과 동시에 사법부 독립의 의미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뜻깊은 날이다. 인천지방법원에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민과 함께하는 제2회 공감법정’ 모의재판 행사를 열었다. 시민단체 회원, 로스쿨 학생, 법학과 교수, 판사·검사·변호사들이 가상 재판에 참여했다. 시민 대표로 참여한 내 역할은 배심...
일전에 내가 몸담고 있는 여성단체에서 전국회원대회를 열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고 직접 참여하는 코너도 있었다. 앞장서서 제안하고 이끄는 성향의 리더가 아니다 보니 어디에서나 조용한 구성원일 수밖에 없다. 이번 전국대회에서도 내 자리는 지지해주고 공감해 주는 역할로 몫을 했다. 돋보일 일도 지적 받을 일도 없는 일상처럼 여기서도 그만그만한 회원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맺은 인연들은 필요한 사람이라고 내 손을 잡아 주고 추천해 주기에 부담이 없다며 초대를 한다. 그렇게 역할을 만들어 줘 인연이 되고 짧은 세월도 긴...
"오디션도 없이 서류만으로 탈락이래요. 심사 기준이 궁금해요." 바쁜 아침 시간에 전화가 왔다. 우리 나이로 73세이신 선생님이다. 일반 전문 모델이 아닌 전 연령대의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축제 행사의 패션모델 선발전이 있어서 서류를 제출했다고 하신다. 올해 73세이신 선생님은 외모 가꾸기와 무대에 서는 일이 너무나 행복한 시니어다. 근엄이 표본인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을 하고 제2의 인생을 즐기며 누리며 사신다. 의상이나 액세서리도 파격이라 누구나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감각으로 사람들 시선을 모은다. 요즘 젊은 아가씨들 키와 비...
애당초 화려함이나 역동의 기상은 물론이고 솔깃해서 빠져들게 할 언변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젊어 한때는 성격 센 언니가 부러워 카리스마 장착한 여성상이 희망사항이었던 적도 있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처럼 밍밍해서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을 위인이 아니기에 있는 듯 없는 듯 티 나지 않게 살았다. 주장하는 쪽의 의견이 단호하면 마음속에는 반감이 생겨나도 대체로 따랐다. 가끔은 이건 아닌데 싶으면 결사반대와 날선 언쟁이 건강한 의견 수렴이 아니라 소모전이 분명하다고 자기 위안을 삼기도 했다. 살아보니 선동이 다 나쁘지도 수...
올 여름은 전 세계가 폭염으로 끓고 있다. 이라크가 53.9℃로 살인적인 기온 경신을 하고 중국 상하이도 40℃를 넘나들면서 고온 오렌지색 경보가 발령됐다고 한다. 해마다 여름은 폭염을 동반하지만 유난히 더운 올 여름은 세계기상기구(WMO)의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이라고 예보했다. 몇 해 전 내리 3년을 대이작도로 여름 피서를 다녀왔었다. 대이작도는 피서객을 유혹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섬이다. 섬에서 잠깐 배를 타고 이동하면 하루에 두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래섬 ‘풀등’이 있고 섬 중앙에는 부소산이 있다. ...
40여 년간 글을 써 온 노작가 현기영 선생님이 산문집을 내셨다. 주요 일간지마다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새로 출간한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의 내용을 발췌한 글이 사람들에게 회자됐다. ‘몸은 늙어가도 심장은 늙지 않는다.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는 문구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했다. 노년은 완숙돼 익은 나이라 모든 면에서 존경할 만한 성품으로 우러름을 받는 인품의 최고봉을 이루는 때인가? 다는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다. 탐욕스러운 이들은...
2월에 이어 6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다녀왔다. 2월 여행에서는 고려 사람들을 만나 함께 어울린 우리 동포와의 교류로 의미가 있었고, 6월 여행은 역사의 흔적과 역사를 이룬 과거 사람들을 현재로 초빙해 일상생활에서 어울리는 현지인들에게 감명을 받은 시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민족과 연결된 역사가 유구한 연해주 지역의 중심도시다. 150여 년 전인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 부락을 형성해 터전을 이뤘던 현재 시가지 중심지인 구한촌과 쫓겨나 다시 세운 신한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힘내라 지수’ 발표가 있었다. 힘내라 지수는 SBS 데이터저널리즘팀에서 전국 228개 시군구에 대한 조사 지표를 바탕으로 지역민으로 살아가기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를 알아보는 통계 지표다. 인천시민으로 살아온 지가 20여 년이라 당연히 내가 사는 인천이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지표의 결과는 인천시민으로서의 자부심보다 의기소침해질 만한 통계 지표를 보여 줬다. 재정의존도, 이혼율, 음주율, 비만율, 자살률, 스트레스인지율, 교통사고 발생 건수 등 삶의 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8개 항목을 선정해 조사...
계절을 알려 주는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여름 글판이 걸렸다. ‘구부러진 길이 좋다. 들꽃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 작가의 시 ‘구부러진 길’ 구절이다. 여름은 열기와 폭우로 뜨겁게 광풍을 몰고 올 테지만, 오늘 마주한 교보문고의 여름옷 입은 글판 세상은 느리고 고즈넉하다. 서울 갈 일이 있으면, 아니 광화문 근처를 갈 일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들르는 곳이 교보문고다. 내 첫 작품집이 세상에 나왔을 때 원로 문인이셨던 변해명 선생님께서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진열돼 있는 내 책을 봤다고 전화를...
5월은 감사와 사랑의 달이라서 선물을 받을 일도, 선물을 할 일도 많다. 선물을 하는 입장에서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선물의 가치다. 선물의 고가 여부를 떠나서 받는 사람을 감동시킬 선물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 마음을 담아 보내는 일도, 받는 사람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일도 어렵다. 어느 기업에서 5월 감사의 달을 맞이해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실시했다고 한다. 직장인에게 물었다. 선물의 감동을 최고조로 높여 줄 나만의 필살기를 공개해 달라는 질문이다. 1위에 꼽힌 것이 ‘선물과 함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