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쓰지 않고 외출해서 당황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코로나가 우리의 무의식까지 침범하는 듯하다.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코로나19에 대응하며 각자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느라 무의식까지 피로한 상태인 것 같다. 대면적 소통을 핵심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 세계’에서 코로나19 등장은 정말로 ‘팬데믹(pandemic)’을 초래했다. 그러나 많은 문화예술교육 종사자들은 이러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했고, 처음의 공황상태와 비교한다면 괄목상대할 만큼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개월 동안 코로나1
지난 11월 4일 송도 트라이 보울에서 제31회 인천 노동자문화제 공연이 있었다. 풍물패 더늠의 판굿으로 개막을 알린 이 행사는 ‘인천노동문화제를 말하다(연영석), 우리가 전태일이다(박준, 지민주),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박창근), 그 길의 끝에서(꽃다지)’ 순으로 진행됐다. 필자는 유튜브를 통해 공연을 관람했다.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것보다는 감동이 덜할지 몰라도 공연자들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노동은 희망이야, 세상을 사는 시작이야"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노동’이 세상과의 작별이 되고 있는 현실과 우리는 마주하
올 2020년도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특히 올해는 이전과 많이 다른 상황 속에서 생활했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더욱이 사회적 거리두기는 학교에서도 단체활동을 어렵게 했다. 수학여행 등 체험학습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과거 여행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그 소중함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심연수 시인의 1940년 수학여행이 주목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청송(靑松) 심연수 시인은 1918년 강릉에서 출생했으나 일제강점의 시대 상황에서 고국을 떠나 만주·일본 등지에서 유
짜장면의 원조가 중국 쟈지앙미엔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다. 쟈지앙미엔이 짜장면이 되고 우리나라 외식과 배달문화 꽃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화교들과 그들의 이민사가 겹친 한중 교류사와 우리 근현대 생활사와 문화사가 함께 버무려 있다. 짜장면을 만들기 위한 주재료인 밀이 한반도에 최초로 들어온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그런데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기후로 인해 우리 땅에서는 밀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밀이나 밀가루를 수입해서 쓸 수밖에 없어서 왕족이나 돈 많은 귀족 이외에는 국수를 먹을
필자는 과거 인천공항에 근무했던 아내를 따라 영종도에서 약 3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다. 올해 스물이 된 큰아들이 4살 때의 일이니 벌써 15∼16년 전의 일이다. 처음 영종도로 이사했을 당시만 해도 영종대교가 개통돼 있긴 했지만, 전철이 운행되는 지금과는 달리 접근성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도시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생활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인프라도 상당히 빈약한 곳이었다.이런 연유로 필자의 기억 속 영종도는 여러 가지 불편한 곳이라는 인식 정도였다. 현재 경제자유구역이자 인천공항이 있는 곳, 과거에는 해상교통과 관방의
얼마 전에 한 독서 모임에서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읽었다. 놀라운 책이었다.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열일곱 살에 ‘신을 만나고 싶다’며 수녀원에 들어갔으나, ‘신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며 7년 만에 환속한 영국의 종교학자이다. 그녀의 이력도 놀라웠지만 독서 토론 내내 경탄을 금치 못한 것은 책 안에 담긴 축의 시대 현자들의 가르침이었다. ‘축의 시대’는 독일의 철학자 카르 야스퍼스가 말한, 인류의 정신적 발전의 중심 축을 이룬 시기로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를 말한다. 700여 년이라는 기
트로트 가수의 언택트 공연이 회자되고 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른 경륜 반백년을 감안하면 해당 가수를 가황(歌皇)으로 지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초등생들조차 ‘테스 형’을 운운하며 가황의 몸동작을 어쭙잖게 흉내 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기현상이라 칭할 만하다. 트로트는 인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랑, 이별, 항구 등이 노랫말에 등장해서가 아니라 인천권번 출신의 기생들이 유성기 음반 역사에서 또렷한 족적을 남긴 경우가 있기에 그렇다. 예컨대 장일타홍과 이화자 등이 그들이다. 장일타홍(張一朶紅, 1910?∼?)과 관련해
인천의 원도심은 개항을 기점으로 조계지가 형성되고 외국의 산업과 문화가 유입되면서 형성된 도시로 1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도시 안에는 다양하고 수많은 근대의 공간과 건축물들이 남아 현재와 공존하고 있다.국내에서도 인천은 근대의 도시형태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 군산, 목포 등의 도시들과 함께 거론되며 문화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러한 지역의 가치와 시대의 다양성을 지키고자 많은 노력이 이어져 왔다.그리고 최근에는 근대산업을 반영한 도시구조와 늘어나는 인구의 수용을 위해 형성된 주거지역의 건축자산이 도시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문화체육관광부는 제15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코로나 일상 속 비대면 예술 지원 방안’(2020.9.9)을 발표했다. 공연, 전시, 교육 등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문화예술 활동은 그동안 대부분 대면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급작스럽게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식과 직면하게 됐다. 이에 정부는 문화예술이 이러한 환경변화에 발맞춰 진화함으로써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창작·유통·향유 전반에 걸친 방안을 수립해 발표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창작, 유통, 일자리, 향유
9월에는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인, 1945년 8월 광복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우리말 시집 「조선미(朝鮮美)」가 발간된 것이다. 물론 해방 이후 처음 발간된 시집으로는 「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편, 1945. 12.)」이 꼽혀 왔다. 그렇지만 1971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제17회 독서주간을 맞이해 그 행사의 하나로 한국현대시집 전시회를 1주일간 개최했는데, 여기서 해방 후 최초로 나온 특이한 시집으로 「조선미」가 소개된 바 있다. 그리고 이 시집의 어디
필자는 그간 대학에서 동양철학 교양 강의를 맡아오면서, 그 철학적 상상력의 기원을 살펴보는 과정으로 동양신화를 먼저 소개해 왔다. 본격적인 신화 강의 전에 학생들에게 늘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다. "바다의 신의 이름은?", 아니나 다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학생들은 당연한 듯 이구동성으로 ‘포세이돈’을 외친다. 물론 그 가운데 눈치를 살피다가 용왕이라고 머뭇머뭇 대답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동양인의 탈을 쓴 서양인이다"라는 말로 그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 다음 동양을 대표하는 해신
"아빠! 우리 역사책에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며칠 전 올해 대학에 입학한 아들의 뜬금없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나온 말이라고 했다. 이야기인 즉, 그토록 동경하던 대학생이 됐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학교에는 제대로 가보지도 못한 채 한 학기를 마친 자신들의 상황이 훗날 역사책에 실릴 정도의 특이한 상황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대학 신입생으로서 대학의 낭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안타까움이 아들의 말에서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고등학교 때까지 힘든 상황
요즘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온라인? 오프라인?’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우선 2학기 대학 강의계획을 올릴 때, 온라인으로 할 것인지 오프라인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섞어서 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큰 틀은 대학 당국에서 결정하지만, 세부적 결정은 교수자의 몫이기도 하다. 교수자들의 대체적인 성향을 말할라치면, 지난 학기 처음에는 온라인이 번거롭고 귀찮았으나 이제는 온라인을 선호하게 된 분위기다. 대면 수업을 갈망하던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시간에, 그것도 반복적으로 강의
5개월의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일상회복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어느새 코로나19와 함께해야 한다는 미래를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의 일상이 돼 조금씩 익숙해지기까지 한 듯하다.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인천은 개항과 광복 그리고 전쟁 이후 한국의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상당한 속도로 팽창하며 성장해 왔다. 지금 인천의 도시규모는 수십 년간 연이어 추진된 신시가지와 신도시 조성 도시개발사업의 결과로 현재는 서울과 연결된 수도권의 광역도시로 경계를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해졌다. 그리고 본래의 인천이 어디
인천을 소개하는 민요의 일부분을 소개할까 한다. 용동 기주(妓酒)로 축현을 넘어율원(栗園)풍류 경아대(景雅臺)가승지 소성(邵城)이 예이로구나얼시구절시구 지화자좋은데인천팔경이 여기 있소(「한국구비문학대계」, 1984)특정 지역을 풍류와 결합시킨 후 그곳을 인천팔경이라 한다. 개항기 일본인들에게 인천을 알리는 책자 「신찬 인천사정」(1898)에 기록된 인천팔경 중에서 ‘화개동의 야색(華開洞の夜色)’이 80여 년이 지난 후 지역 민요에 견인됐던 것이다. 이참에 팔경에 대해 살펴보자. 팔경(八景)은 절경 혹은 승경을 의미한다. 경치가 좋은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코로나19로 우리 일상은 크게 바뀌었고, 익숙하고 당연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 반년이었다. 코로나19는 많은 분야에 걸쳐 교류와 협력이라는 가치가 위협받는 시간을 초래했다.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 그 타격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었다. 장기화되는 코로나19로 인해 문화소비 총량이 감소됐으며, 많은 문화예술산업 종사자들이 생업의 존폐 기로에 서게 됐다. 처음에 우리는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기를 희망했지만, 지금은 ‘With Corona’라는 말처럼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는 일상의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 등으로 생활 형태가 이전과 다르게 바뀌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외출을 줄였다. 더욱이 코로나19 장기화는 가계 수입 감소와 경기침체를 야기했고, ‘코로나 블루’로 불리는 우울감 또는 무기력증을 불러오기도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이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아니어서 가족 구성원들이 만날 시간이 많아지게 된 점이, 그들 사이에 친밀감을 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오랜 만남이 갈등을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와 거리는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인지 전국적으로 3·1운동과 함께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행사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 여파도 있겠지만, 또다시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지난 6월 16일 인천 중구의회에서 ‘감리서터 휴게쉼터 건물매입비’ 전액을 삭감했다. 인천감리서는 1883년 8월에 설치됐다. 처음에는 통상(通商)업무만 했으나, 후에 개항장의 외국인과 조선인 간 분쟁을 해결하며, 치안을 유지하는 업무까지 담당했으며, 1896년에는 개항장재판소가 개설됐다
"그는 ‘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땅거미가 질 때부터 동틀 때까지 밤에 오로지 ‘독서’만 하면서 보냈고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낮에도 독서만 하면서 보냈다. 이처럼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독서’에만 열중한 탓으로 결국 그의 뇌는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마침내는 이성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읽는 모든 것, 즉 마법, 싸움, 도전, 부상, 구애, 사랑, 고통 그 밖의 온갖 터무니 없는 상념들에 모든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자신이 읽는 모든 환상적 요소들이 사실이라고
경주 달 밝은 밤에/ 밤새도록 노닐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로구나.//둘은 내 것인데/둘은 누구의 것인가?//원래는 내 것이었지만/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 편의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조에 나오는 향가 처용가이다. 이 노래에는 배경 설화가 있다.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황성인 경주로 오게 되고, 왕의 배려로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다. 하루는 처용이 달밤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혼자 자고 있어야 할 부인의 잠자리에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