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영종도에 세운 우유목장개설 당시 주민과 마찰로 '시끌' 인천 섬 곳곳 세종때부터 국영목장 운영 구한말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영종지역에 대규모 우유목장과 양돈·양계장을 세우려 했으나 당시는 외국인의 명의로 허가를 받을 수 없어 일본인은 편의상 조선인 황석원과 이치명 등과 결탁, 영종도에 대규모 땅을 매입했다.당시 일본인이 매입한 땅은 10여만 평에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급속히 편입됐으며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서양과의 직접 무역이 시작됐다.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정부는 개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인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그 첫 시도로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했으며 당시 조선정
1885년 9월 인천~서울간 전신 개통 지금은 휴대전화와 인터넷 등으로 전보 수요가 크게 감소했지만 전화가 흔히 쓰이지 않던 10여년전만 해도 전보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전보로 대표되는 전신업무가 우리나라에 도입돼 시행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0년전인 1885년이다.1885년 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와 합작으로 인천에서 서울까지 전신가
미 개신교목사 부부 첫 선교 지역에1890년 신도가 자비로 세운 교회당개화기 인천은 제물포항을 통해 서구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으로 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갑신정변으로 국내상황이 어지러웠던 1885년 4월5일 부활절이기도 한 이날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일본 요코하마항을 출발한 상선 쓰루가마루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을 밟았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약(1876년)이 체결된 지 6년 만인 1882년 인천에서는 서양과 최초로 국교를 체결하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다.미국은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상원의원인 사전트가 조선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일본을 중재자로 내세워 조선개항을 추진했다.미 정부로부터 특별사명을 부여받은 슈펠트 제독은 1880년 5월 일본
단군 때부터 하늘에 제사 올린 까닭은강화 마니산 한반도의 중심 ▲ 강화 마니산 전경 전국 땅 기운 중 최고 '명성'민족의 영산인 강화도 마니산에는 국조 단군과의 관계를 전하는 유적이 유달리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단군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는 사적 136호인 참성단이 있다.이곳은 절벽 위로 자연석을 쌓아 만든 일종의 신전으로
"60년 전통 박물관에 국보.보물은 없다" 해방 이듬해 세창양행 건물에 364점 유물 전시하며 개관6.25 전쟁통 건물 전소 불구 직원들 노고로 유물은 사수53년 중구문화원 자리에 새둥지...90년 4000여점 소장 연수동 시대 ▲ 인천박물관이 전쟁이후 자리를 옮긴 현 중구문화원(왼쪽)과 90년 연수동에 새로 건립된 박물관. 인천에서 최초라는 명칭을 얻은
하와이 이민의 꿈.시련 지켜보다 1902년부터 3년간 7843명 이주사탕수수 노동자로 힘겹게 번돈15만달러 쾌척 인하대 건립 '결실' ▲ 최초 한인 이민자들이 타고 간 갤릭호.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에는 살을 에는 차디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 기다릴지 모를 이역만리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옹기종기 모인 121명이 설렘과 두려
인천이 1883년 일제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이후 각종 이권을 노린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세계 열강들이 인천에 몰려들면서 인천항을 중심으로 각국의 특정거류지역인 지계가 설정되고 많은 외국인들이 집단촌을 이루며 모여 살기 시작했다.지금으로 보면 침략자의 일원인 이들 외국인들은 인천의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각종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며 남의 땅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는 조선정부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침략전쟁 도구로 일제의 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일본은 인천개항때인 1883년 조선과 체결한 `통상장정'에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등대건설을 강권함으로써 조선은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이듬해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강화도에 세운 사관학교 2년만에 폐교된 까닭은...화물선 개조한 '양무함' 이름만 군함이듬해 두번째 입항 배도 '유명무실'日, 조선 해양강국꺼려 강제 폐교구한말 시절은 서구 열강들이 군함을 앞세우고 한반도 연안에 빈번하게 출몰하면서 갖가지 요구를 내세우며 침략하는 사태가 빈번히 벌어졌다.특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프
청량산 자락을 타고 서북방향 바다 쪽, 그러니까 경제자유구역으로 개발되고 있는 송도국제도시가 바라다 보이는 돌출된 반도형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오뚝한 봉우리에 능허대가 자리잡고 있다.지금은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공원처럼 이용되고 있지만 이곳은 백제시대 우리 선조들이 중국 대륙과의 뱃길을 처음 연 곳이다.비록 사신을 보내기 위한 교통수단으로서의 통교였지만 이
인천항 개항으로 인천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자리잡으면서 서양은 물론 일본과 청국인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침탈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종주권을 주장해 온 청국인들은 개항 초기에 정치, 경제 등 여러면에서 우리 정부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며 호시탐탐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본은 무역 등 여러면에서 청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경쟁하고
`협궤열차는 서서/기적만 울리고 좀 체 떠나지 못한다/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 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신경림 시인은 `군자에서'라는 시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협궤열차의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꼬마열차'로 불렸던 협궤열차를 한번이라도 타본 사람들은 열차안 승객들의 면면과 객차안의 풍경을 쉽게 떠올릴
외지 사람들은 인천하면 `짠물'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리는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짠 바닷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인천만이 아닌데도 유독 인천에만 짠물이라는 호칭을 붙인다.알고 보면 인천 또는 인천사람에게 짠물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6·25 동란 이후 피난민들이 대거 인천에 정착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오면서 붙여졌다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
최근 일어난 남아시아의 대지진에 따른 해일로 수십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면서 기상관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기상관측은 고대부터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문헌 기상에 관한 예측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독립적으로 기상일을 맡아보던 `태복감'(太卜監), `사천대'(司天臺), `관후서'(觀候署) 등의 명칭을 가진 측후관
오는 30일부터 담배 값이 일제히 500원씩 오름에 따라 애연가들은 이참에 아예 끊어버릴 것을 고민하고 있지만 담배끊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어서 연말연시에 이래저래 고민거리만 늘어나게 됐다.담배는 서기 5∼7C 남미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 신전석벽에서 담배피는 신관이라는 조각이 발견돼 이미 오래 전부터 흡연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콜럼버스가 아
나이가 지긋한 사람일수록 까만 춘장에 면을 비벼먹었던 자장면에 대한 추억은 남다를 것이다.한 때 자장면은 고급 요리로 졸업식이 끝난 후 학교 주변 자장면집에는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지금은 가격이 많이 대중화돼 자장면의 자리를 고급 중국음식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자장면이 처음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1883년 인천이 개항한 후 만들어진 청국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들어온 것은 1882년 중국 유학생이 톈진(天津)에서 돌아오면서 전화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 처음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최초의 전화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 실제로는 1896년에야 비로소 궁중에 개통됐다고 한다.당시 궁내부에 설치된 전화기는 모두 9대로 각 아문과 연락하기 위해 덕수궁에 설치됐는데 기록에 따르면 외부의 관원들에게 퇴근하
지금은 많은 공원들이 산재해 있지만 불과 10여년전만 하더라도 인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을 꼽는다면 단연 자유공원을 꼽았다.계절마다 피어나는 온갖 꽃으로 잘 단장한 자유공원은 오랜 세월을 보낸 공원답게 아름드리 나무가 산재해 있고 한눈에 들어오는 인천항과 월미도, 작약도 등을 오가는 각종 배들의 항해모습을 보면 가슴까지 확 트였던 공원이다.인천박물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