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식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교수
신진식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교수

대다수 사람들은 ‘씬’이라는 단어가 영화에서 쓰인다는 건 잘 알지만 음악에 쓰인다고 했을 때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잘 모를 것이다. 이 ‘씬’은 바로 익숙한 영어 ‘scene’인데 그 의미 가운데, 간단히는 한자어 계(界)나 프랑스어 장르(gnere)로, 학문적으로는 ‘일상적인 흐름을 벗어난 문화적 수행이나 소동 혹은 난장, 그리고 카니발이 일어나는 문화적인 생성의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Scene은 스트로우(1991년)가 몬트리올 음악 생산 공간의 예를 들며 제시한 개념으로, 영어의 용례에서 ‘일을 벌이다’ 혹은 ‘무언가 소동을 일으키다(making a scene)’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을 활용했다. 특정 지리적 단위인 지역성(locality)을 닫힌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열린 경계성(porous boundary)에 의미를 두는 개념이다. 우리말 대신 꿋꿋이 영어 그대로를 가져와 ‘음악 씬’, ‘인디 씬’, ‘힙합 씬’, ‘홍대 씬’ 같은 말에 쓰일 때가 바로 그 의미다.

이제는 ‘인천 씬’의 의미에도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인천시내를 여기저기 다니다가 발견하는 현수막들과 포스터들은 인천은 음악의 도시요, 다양한 축제의 도시라고, 심지어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연초부터 최근까지 사운드 바운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포크 페스티벌, 개항장 밤마실 음악회, 음악불꽃축제, 로컬음악:음계인천, 지역 노랫말 공모전 등 인천지역 다양한 음악 관련 축제 광고가 끊이질 않았다. 음악도시라 자처하는 인천 ‘씬’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인천은 조선시대 말 개항을 통해 각국 영사관이 설치돼 많은 외국인들이 활동하는 근거지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문화가 만나고 섞일 수 있었던 도시로 변해 간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든다. 그곳에서부터 찬송가와 함께 ‘창가’(唱歌)라는 명칭의 서양음악이 들려지고 불려진다. 인천은 서양음악과 서양음악가가 최초로 상륙한 곳으로, 서양음악을 처음 경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인천 씬’은 태동한다.

교회 밖 공간에서 서양음악 활동이 이뤄진 것은 1920년 전후의 일이었다. 1920년 8월 19일 오후 8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극장 중 하나였던 인천 ‘가무기좌’에서 서양음악에 익숙한 중국 악사와 조선인들로 구성된 악단의 ‘동서음악대회’라는 음악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당시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관객이 들어 대성황을 이뤘고 기부금으로 273원84전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기사가 1920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1920년대 초반 인천 인구수가 한국인은 2만4천여 명, 일본인은 1천300여 명 정도라 하는데, 1천여 명의 관객이 들었다는 것은 엄청난 인파였으리라 짐작된다.

조금은 다양한 음계의 소리가 귀에 들리고 입으로 전해지더니, 낯선 소리의 악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양(洋)음악’이 이것저것 들리는가 싶더니 거기에 맞춰 몸을 움직여 ‘딴스’를 하게 됐다. 그렇게 완전히 이질적이었던 문화와 음악은 알게 모르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다양하게 섞이며 100년의 시간을 지나온다. 다양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후손들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에 쉽게 다가가 활발히 활동한다. 인천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한국 록의 중심 시로, 헤비메탈의 도시로 자리잡아 간다. 수많은 인디밴드들을 배출하는 등 음악적 토양이 두텁게 쌓여 갔다. 그렇게 ‘인천 씬’은 무르익어 갔다.

인천은 그렇게 일찍이 다양한 것들이 섞일 수 있었던 ‘수혜’의 도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오히려 더욱더 많은 것을 쉽게 내어주고 ‘인천 씬’은 급속히 그 빛을 잃어 갔다. 그 명멸의 과정을 지켜보던 인천의 음악인들은 최근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씬’을 가꾸고 복원해 성장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1980∼90년대 활발했던 인천의 밴드음악 문화가 서울 홍대 주변으로 그 중심이 옮겨진 후 변방이 돼 버린 인천 신포동 등지에서의 노력이 눈에 띈다. 과거 활발했던 ‘인천 씬’을 재창조하려는 음악 관련 공간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고,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 주려 시도한다. 아무쪼록, 역사적 공간의 이야기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도시로서 인천이 우뚝 서길 기대해 본다. 아울러 ‘인천 씬’이 우리 대중음악사에 다시금 신선한 자극이 돼 주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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