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근대 발자취 곳곳에

 

인천시 계양구에는 일제 강점시대 인천지역 시민들이 대규모로 3·1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현장에 건립된 황어장터 3·1만세 운동 기념관을 비롯해 계양산성과 부평도호부청사, 이찰·이율형제 효자정려문 등 역사적 기념관이나 기념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식민통치로 훼손 동헌 일부만 현존

◇부평도호부 청사

▲ 위에부터 부평도호부 청사, 계양 산성 전경, 이찰.이율 형제 효자 정려문


부평도호부청사는 현재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43번지에 있는 부평초등학교에 위치, 동헌(東軒)의 일부로 보이는 건물 1개 동만 현존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여지도선(與地圖書)'의 내용에 따르면 `동쪽으로 36리 지점에 경도(京都)와 경계로 감영까지는 55리로서 반나절 가량 소요되며 서쪽의 수영(水營)까지는 120리로서 하루반이 걸린다'며 당시 부평과의 위치와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헌종 8∼9년(1842∼1843)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 중 부평부읍부 편에는 부평부의 중심인 부내면에는 방리가 관문 전후좌우 2방으로 가구는 252호로 기록돼 있어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여지도서'의 기록보다 38호가 증가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공해 건물로 객사 아사(衙舍) 부창 연무청 군기고 향청 장청 이청 등이 모두 해좌사향(亥坐巳向)하고 있으며, 부(府) 서쪽 2리에 향교가 해좌사향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한말까지 그 면모를 잘 유지해 오던 부평도호부청사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어쩔 수 없이 훼손되거나 이전 또는 용도 변경돼 과거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고 말았다.

부평도호부청사 자리에 부평초등학교를 동헌에 잇따라 세워서 교사로 사용해 왔다. 이때의 건물구조는 'ㄱ'자(字)로 돼 있었는데 1968년에 건물울 지금의 위치(동쪽 100여m 지점)로 이전하면서 한쪽의 건물을 없애 `일(一)'자 모양의 건물만이 남게 됐다. 그리고 옮긴 위치도 욕은지(浴恩池)와 인접해 어사대(御射臺)자리에 세우고 어사대는 남쪽으로 20m쯤 옮겨 세워졌다.

부평도호부의 설치연대는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나 청사가 세워진 연대는 알 수가 없으며, 현재의 건물이 동헌이라고 전해올 뿐 여러 차례의 보수와 이전으로 이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건물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서 내부는 3본(本)의 내진주(內陳柱)가 놓여 실내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정면과 배면에는 모두 창호가 구성돼 있으며 측면에 전면간(全面間)에만 외짝의 여닫이문이 달려있다.

외진주의 형태는 원주형이고 내진주는 방주로서 보방향으로는 기둥배열과 같은 선상에 놓이나 측면의 도리방향으로는 중앙의 기둥과 일치하지 않아 구조적인 기능을 하는 기둥이 아니라 툇간을 구성하고 내부의 실을 만들기 위해 쓰여진 기둥임을 알 수 있다.

본 건물은 1968년 현 위치로 이전시에 평민의 형태와 건물의 규모가 축소 변화됐으므로 현재의 상황으로는 정확한 건물의 배치와 원형을 파악할 수가 없어 평면구성의 원래모습은 단정지을 수 없다. 단지 내부의 특정용도의 실(室)이 평면의 좌측에 구성됐으며 우측으로는 대청마루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본 건물이 동헌인지 아니면 내아(內衙)의 일부인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서해 군사.교통 관문 역할 톡톡

◇계양산성

계양구청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팔각정으로 방향을 잡으면 정상 부근에 돌로 축성된 띠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계양산성의 흔적이다.

`증보문헌비고' 관방 성곽조에 `부평 계양산성은 삼국시대 때 축조된 성으로 석축 둘레가 1천937척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했는데 백제가 쌓은 것으로 보여지나 백제시대의 산성은 대부분 토성(土城)인 점으로 보아 단정지을 수는 없다.

계양산성은 계양산 주봉에 축조돼 있지 않고 동쪽 기슭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성의 내부는 솟아오른 봉우리 능선을 중심을 배치돼 있다. 성벽의 여러 곳이 허물어져 있으나 원래 성의 모습은 유지하고 있다. 이성(李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보수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조 원년(1455)에 서울을 방어키 위해 부평부에 중익진을 설치해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군사기지가 성 아래 병방동에 있어 병방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으며 이 때에 성을 수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계양산은 지리적 요건으로 볼 때 한반도 중심부인 한서(漢西)지방인 서연해(西沿海)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 건너는 중국대륙을 마주하고 있다. 한강 하류는 계양지방을 감싸고 서해로 흐른다. 수천 정보의 북단에 특이하게 돌출한 것이 계양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해의 관문으로 군사상 또는 교통상 아주 중요시 해왔다. 그래서 먼 삼한(三韓)시대부터도 군사상 이곳을 중요시했으며 특히 삼남지방과 북한지방은 물론 중국대륙과의 교통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또한 과거 개경·한양의 인후(咽喉)로서 큰 구실을 해왔다.

그리고 한양과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관계로 먼 삼한시대 백제시대에는 성첩을 쌓아 호국의 방패로 삼았고 고구려가 이곳 땅을 차지하고는 이 산성을 중요시 해왔으며 신라시대에도 역시 이곳을 중요시 해왔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빈번한 외침에 대비해 전라도(전주)에 뒀던 안남군사기지인 안남도호부를 1150년에 그 이틀째 계양땅을 이전하고 계양산성을 수축해 이를 군사기지로 사용했으며 특히 안남도호부를 전라도 전주에서 이전 설치한 이후에는 수도방비의 군사기지가 됐다.

병자호란 이래 계양산성은 관리가 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되다 보니 성은 무너지고 성돌은 사람들이 가져갔다. 그리고 임자 없는 땅이라 묘지를 마구 써 고총이 됐고 심지어 일제 때에는 이를 빌미로 해서 의도적으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1940년 시립 공동묘지는 폐지됐으나 그 후 불법매장이 계속 늘어나 현재 이 계양산성에는 묘가 200여기나 된다.

이 고성에는 부평평야가 기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등 전망이 아주 좋은 데다 수년 전 계양구청이 산정에 정자를 세운 후로는 공원화가 돼 등산을 겸한 이용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현재 사적공원화 계획에 의해 계양산성 복원이 추진중이다.

1990년대 인천시장의 인천소재 고성(계양산성 중심성 문학산성 영종성)에 대한 복원여부 등의 조회를 해와 이훈익(李薰益) 위원이 그 해 계양산성을 실측하고 약도와 의견서를 회신한 바 있다.

서첩을 실측한 그 규모나 내용을 보면 성은 타원형이고 마치 사람의 신과 유사하며 위치는 계양산 동록(東麓)에 있다. 그리고 성주위는 1천201m로 동측 408m, 서측이 525m, 남측이 197m, 북측이 71m가 된다. 성높이는 7~2m, 성폭이 상층 5m, 하층 2.5m, 장대(將臺;사령관지휘소)가 천연적으로 형성돼 있으며, 2번 장대위에서는 기묘한 석층이 발견된다.

성 하부 평지에는 병사지(兵舍址)의 흔적이 남아있고 와편(瓦片)이 산재해 있으며 옹달우물 자리도 남아있다. 성안에는 무너진 성돌이 산재해 있고 초목들이 자생하고 있으며 성곽안에는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약 200개의 분묘가 있고 묘비도 많이 서 있음을 볼 수가 있다.

 

3.1만세운동 함성 아직도 귓가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1919년 3월1일을 기해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24일 오후 2시께 오류리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해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 임성춘 등 주민 2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체포돼 가는 심혁성의 탈환운동을 전개했다.

부내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지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돼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특히 성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선 선주지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도 파괴,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했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 중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심혁성은 징역 8월에 처해졌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 전개에도 견인차 역할을 전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애국지사들은 김영권 김창열 박문칠 배응준 송광현 심혁성 안윤필 유연봉 (유석기) 윤해영 이공우 이금산 이담 (이태현) 이은선 이태완 임성일 임성춘 임창현 전기순 전봉학 전사삼 전상근 전원순 전천능 정태용 조성칠 채귀현 채규명 (채상현) 채봉운 채봉혁 채흥봉 최성옥 최청일 홍여선 등(가나다 順)이다.

 

우애.효심에 정려

◇이찰·이율 형제 효자정려문

지역문화재인 인천시 기념물 제52, 53호(2004년 4월6일 지정) 이찰·이율 형제 효자정려문(갈현동 산78-1)과 이선봉 묘역(동양동152-5)은 이찰·이율 형제의 효행과 이선봉 집안 여성의 정절 등을 널리 전하고 있다.
 

이찰·이율 형제는 광해군 6년(1614년)부평고을 갈월리(현재 갈산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가 병들어 백방으로 약을 구해 보살폈으나 백약이 무효로 병환이 위독하자 형제는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아버지 입에 흘려 넣어 주는 정성을 보여 소생했으나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머니마저 병들어 임종하려하자 또다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어드렸으나 결국 모친도 사망하자 그들은 정성을 다해 장례를 모시고 산소 옆에 묘막을 지어 형제가 같이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한다.
 

이 효행이 나라에 상소돼 임금이 신하로 하여금 그들의 효행을 기록토록 하고 표창하기 위해 현종 11년(1670년) 효자 정려문을 세웠다 한다. 수 년전까지 갈월리 종손 집에 위치하다 도시화에 밀려 현재 계양구 갈현동 묘소로 이전돼 전해지고 있다.
 

또다른 이선봉 일가 봉분 3기 묘역의 유래를 보면 조선시대 `진무종훈'의 공을 세운 `승헌대부 순평군 이선봉'은 부평고을(현재 동양동)에 낙향, 정착했다. 아들 이필혐은 벼슬길에 올라 한성판관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선봉의 아내 현 부인 영월 엄씨와 그의 며느리인 판관 이필혐의 아내 구씨가 강화성으로 피난 갔는데 청나라 군대가 피난지까지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양민을 약탈, 살해하자 엄씨 부인은 적군에게 잡혀 죽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해 자결했다. 그러자 그의 며느리인 구씨도 어린 여자 종 치마폭에 유서를 써놓고 시어머니를 따라 자결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훗날 알려져 인조 16년(1638년) 열녀정려가 내려져 정절의 고귀함이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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