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벗삼아 농사를 짓다가 어느날 갑자기 조선 제25대 왕(철종)이 된 강화도령.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강화도령 이원범은 헌종 10년(1844년)에 형 회평군이 옥사에 연루돼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됐다.
 
강화도령은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순조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으로 봉해진 뒤 그 해 6월9일 19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의 3칸짜리 초가 움집이었다.
 
그러나 잠저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 철종 4년(1853년)에 강화유수가 기와집으로 확대, 개축해 용흥궁이라고 이름지었다.
 
용흥궁은 팔작지붕에 홑처마 구조의 살림집 형태로 지어져 질박한 느낌을 준다.
 
고종 광무 7년(1903년)에 중건된 뒤 1974년 보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인천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돼 보호, 관리되고 있다.
 
궁안에는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알리는 비와 비각이 있다.
 
강화도령은 왕이 된 뒤에도 어릴때 먹었던 시래깃국과 막걸리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철종은 옛 맛이 그리워 참을 수 없을때는 산해진미를 마다하고 이를구해 오라고 명을 내렸다.
 
막걸리는 이문안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입에 맞는 시래깃국은 찾을 수 없어 강화 외가에서 가져다 수라상에 올렸다고 전해진다.
 
철종의 외삼촌 염보길이 살던 외가(지방문화재자료 제8호)는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허물어져 지금은 `ㄷ'자 형태의 건물만 남아있다.
 
강화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김포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산세가 험해 옛날 산적이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이 고개 이름이 `천둥고개'인데 강화도령과 관련된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화도령이 임금이 돼 한양으로 갈 때 산적들이 일행을 덮쳤다.
 
갑작스런 습격에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자 강화도령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쳐 산적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 때 강화도령의 호통소리가 천둥소리 같다고 해서 고개 이름이 천둥고개가 됐다고 전해진다.
 
또 강화로 유배가던 강화도령이 이 고개에 도착하자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며 천둥이 몰아쳐 천둥고개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화도령은 왕이 된 뒤 임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 처음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철종 2년(1851년)에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해 세도정치를 하게된다.
 
철종은 1853년부터 친정에 나섰으나 세도정치의 소용돌이에 농민봉기 등 사회적 혼란까지 겹쳐 뜻을 펴지 못하고 1863년(재위 14년) 12월8일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농사꾼에서 하루 아침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철종은 고양의 예릉에 잠들어 있다.
 
철종 역시 영혜옹주 외에 후사가 없어 신정왕후의 뜻에 따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이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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