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기보다 우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번다. 그렇다고 이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소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를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 내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욕심 때문에 기러기 아빠도 감수하고, 온 나라가 사교육과 대학입시의 홍역을 치른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바탕이다.
나랏돈 분배에는 모두들 무감각
그런데 어떤 정치인이 갑자기 없는이를 위해 분배하자고 외친다면, 앞에 나서서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기가 꺼려진다. 왜냐하면 우선 그 말이 좋은 말이고, 만약에 싫다고 말한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배할 돈이 내 돈이 아니라 나라 돈이라면 상관없다고 끄덕인다.
그런데 나라 돈에는 우리 세금과 과거의 땀과 미래의 몫이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정치인은 자기 재산이나 권한을 먼저 내놓지 않고서도 천연덕스럽게 자기 것을 내놓는 것처럼 분배를 외친다. 없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솔깃해 한다. 이런 인기몰이가 대중들에게 먹힌다면 군부 독재자가 총칼의 힘을 빌고 재벌이 돈의 힘을 빌듯, 선동 정치인은 이념적 구호를 빌려 권력을 갖는 셈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없는이에게 제 권력을 나누어주는 건 아니다.
사실 모두들 그렇게 많이 가지려고 하면서 가진이들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또 종교적 차원까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많이 가진 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가진이가 사회적 책무를 덜 하는 게 나쁜 것이다.
물론 재산이나 권한을 취한 방법이 나쁠 수 있어 그것을 막는 장치를 강구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개인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 등 자본주의에는 부작용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에 곁눈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사회 동력의 원천이기에,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제도 자체만으로는 이상적인 사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준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복지 확충이나 사회보장제도, 기부나 사회 환원 등의 방법으로 부작용을 메우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진자의 책무는 없는자에 비해 당연히 크고, 또 우리는 이를 소홀히 한 책임을 가진자에게 물을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 동안 가진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덜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헌법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로 고치지 않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체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제도의 끝에는 개인이 있다. 그러므로 없는이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결국 개인이 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정작 말단의 개인이 제 욕심만 챙기느라 사회적 결과물을 나누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로 바뀐다고 해서 사회복지가 보장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사회주의에서는 통제해 나누어 주는 이가 자발적인 민간 개인에서 강제적인 정부 관료의 한 사람으로 대치되는 것뿐이다. 일례로 과거 소련이나 동구권의 사회주의에선 정부만 커지고 기업 등의 개인은 없어져 개인의 일할 의욕은 떨어지고 전체적인 사회 동력이 끊어졌다.
존엄성을 갖춘 개인이 사회의 밑바탕
유럽의 시민혁명이 얻은 것도 바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이었고,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도 이 바탕에서 자라났다. 누구나가 존엄한 개인이기에 우리는 없는이를 배려하는 것이며, 아무리 민족과 통일을 외치더라도 북한 주민의 인권을 염두에 두는 것이며, 희생된 인권 때문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그 어떤 테러도 비난받는 것이다.
존엄해 스스로 나눌 수도 있는 ‘건강한 개인들’이 바로 선진사회로 가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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