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 그것이 어떻게, 왜 형성되는가에 관해서는 정치학계와 역사학계를 비롯해 많은 학문분야에서 엄청난 분량의 다양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그 용어를 정의하는 것조차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현학적인 설명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집단화의 현상 중 하나라는 것과 어떠한 인간일지라도 반드시 이 두 가지 집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엄연한 사실은 평범한 상식으로도 쉽게 확인이 된다. 그렇다. 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개의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삶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고 최소한 인간적 삶에 대한 청구의 권리를 갖게 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의 의미나 가치라는 것조차 이러한 '소속'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나의 이러한 집단에 대한 충성의 당위가 성립하는 것 아니겠는가.

              두 집단의 소속방식에 차이 있어

그런데 인간이 이 두 집단에 소속하게 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어느 국가의 국민이 되느냐 하는 것은 속지주의, 속인주의를 불문하고 나의 탄생과 동시에 확정되게 마련이지만, 나는 이렇게 확정된 소속을 나의 의지에 의해 비교적 쉽게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어느 민족의 소속원이 되느냐 하는 것은 나의 탄생 전에 이미 확정되게 마련이며 나의 평생을 두고 변경할 수 없다. 비록 민족 간 혼혈이라 하더라도 '1/n의 한국인'이라는 식의, 다소 정체성이 흔들리는 표현을 쓰게 될망정 그 혈연의 기록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튼, 내가 반드시 속해야 하는 집단이 두 개가 있고 그 두 집단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선택 가능성의 차이는 심각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와 민족이 그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달리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어찌 보면 둘이 통합된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보편적일 듯 싶다. 게르만, 라틴, 슬라브, 아랍, 한(漢) 등의 어느 민족도 단일한 국가로 통합되었던 예가 없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느 나라도 단일한 한 민족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를 찾기 어렵다. 그 뿐인가. 같은 민족의 뿌리이면서도 누백년 누천년을 두고 총칼로 피를 뿌리며 맞서온 것이 바로 그들 민족의 역사가 아닌가.

왜 두 집단은 통합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학문적 주장에 따라 나열하자면 또다시 한없는 방황을 해야 할 것이라서 차라리 용기를 내어 거두절미하고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그 이유는 결국 '생존경쟁의 법칙에 의한 무리짓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민족적 공통성에 충성하는 것보다 선택가능한 국가의 이익이 더욱 자신의 생존에 유리할 때 인간은 당연히 그러한 가변성을 선택하지 않는가. 그래서 좀 더 선택적인 '국가의 현실적인 가치'가 좀더 '이상적인 민족의 가치'를 앞서게 마련이고 같은 민족도 서로 다른 국가로 나뉘어 이익을 다투는 것이 아닌가.

요즘 친북, 과거사 청산 등의 문제와 관련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민족주의적 재해석이 뜨겁다. 맥아더나 강정구 사건 등을 매개로 해 세상이 금새 둘로 갈라져 버릴 듯 맞서는 모습이 자칫 위태롭기까지 하다. 민족과 통일을 내세우면 진보와 선각의 의사와 열사가 되고, 현실의 삶의 이익을 이야기 할라치면 아무 것 가리지 않고 식견 좁은 반통일의 수구 골통으로 매도되고 마는 분위기이다. 자칫, 민족과 통일 앞에는 법도 없고 사회의 기초적인 예의도 없으며 그것들은 거추장스런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는 유행이 형성되는가 싶다.

                현실적 이익 육성을 통한 이상 성취 시도를

E.H.카 교수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역사는 언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법이 없다는 사실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역사도 내게, 민족의 가치가 국가의 가치를 우선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으며 내가 민족을 위해 죽을 것인가는 오로지 나의 선택에 속한다. 물론, 나는 우리 민족의 가치가 나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미래에 선택해야 하는 가치와 일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당장 두 개 집단의 가치를 강제로 일치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행복을 뒤흔들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다. 이상을, 현실의 살인적 파괴를 통해 성취하기보다는 현실적 이익의 주도면밀한 육성 속에서 달성하려는 시도가 훨씬 성숙한 인류의 선택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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