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네스코 전국대회가 강화도에서 지난달 말 개최됐습니다.

취재차 1박2일로 강화도에 동행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부러워하더군요.

`좋겠다' `재미있겠다' 한결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강화도의 이미지는 경치 좋은 관광지인 듯 합니다.그런데 막상 경험한 강화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인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광성보, 초지진, 덕진진 등의 국방유적지까지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는 곳이 강화도였습니다.

유네스코 인천시협회 하석용 회장의 구수한 입담과 함께 둘러본 강화유적지의 숨은 매력을 소개합니다.

내친 김에 구국의 성지로서 강화도를 재조명하고 아낙들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왕골 및 화문석에 대해서도 살펴볼까 합니다. 〈편집자 주〉


광성보

신미양요의 발생지. 로저스의 일기

전 세계적으로 미국은 82개국과 전쟁을 치뤘고 대부분 승리했다.

우리나라와도 조선 고종 8년(1871) 당시 미국의 아세아함대가 광성보를 유린하면서 전쟁이 시작됐고 48시간 만에 우리 수비군 350여 명 전원을 전멸시켰다.

이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다.

함대를 지위했던 미군 장교 로저스는 그날의 전투 상황을 일기에 남겼는데 `우린 이겼어도 졌다'가 그 첫 마디였다.

“나는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지만 이처럼 처절한 싸움은 처음이다. 그들은(조선 수비군) 구식 무기로 우리에게 대항했고 상륙부대가 광성보에 오르자 백병전을 전개했다. 전투 경험도 전혀 없는 그들은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창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대항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한 팔이 잘리자 이로 물어뜯기까지 했다. 단 한 사람도 물러서거나 포로가 되지 않고 모두 죽었다. 우린 전쟁에 승리했지만 현재 두렵다. 몹시 두렵다.”

로저스의 일기문이다.

아세아함대는 전쟁에 이겼음에도 다음날 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전 세계 역사상 이긴 전쟁에서 도망친 사례는 광성보의 신미양요가 유일할 것이다.

 

광성보 둘러보기

광성보는 조선조 구국 성지의 대표격이다.

평지에 땅을 도툼하게 쌓은 이른바 돈대를 만들어 바닷길을 이용해 들어오는 모든 배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천연요새다.

광성보에 들어서면 심지에 불을 당기는 화승포 3문이 나란히 전시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의 병기인 9인치 85문의 대포와 비교할 때 초라하기 그지없는 무기다.

당시 병력도 미군이 1천230여 명인 반면 우리 수비군은 불과 35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 옛날 전원이 장렬히 순국했던 치열했던 전쟁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고종은 이후 순국한 용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손과 발, 몸통과 얼굴의 짝이 맞지 않는 59명의 무명용사에 대해선 7개의 분묘를 만들고 합장했다.

현재도 7개 분묘인 신미순의총은 그대로 보존돼 해마다 제를 올리고 있다.

신미순의총 옆엔 그날의 전투를 이끈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 장군의 추모비인 쌍춘비각이 있다.

쌍춘비각은 고종때 축조된 비와 현대적 양식의 비가 공존하는 곳으로 전통과 현대의 오묘한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광성보는 특히 바닷가를 끼고 돌아가는 울창한 송림의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고인돌

세계적인 지석 문화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지석문화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해 영국의 스톤헨지 등이 있고 한반도엔 기원전 13C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돌(부락간의 경계석)과 고인돌(묘제)이 있다.

그 중 고인돌은 인류가 농경문화를 시작한 이래 남긴 문화유산으로 전 세계적으로 5만5천여 개가 있으며 이 중 한반도에만 2만6천여 개가 있는 것으로 조사돼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고인돌의 가치는 당시의 사회상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무게만 해도 약 300 t 이상 나가는 거대한 화강암을 우마를 이용한 인간의 힘만으로 옮겨 쌓았다는 것은 국가 수준의 절대권력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죽은 자에 대한 묘로 사용됐다는 것은 권력의 세습이 이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고인돌 둘러보기

사적 137호로 지정된 부근리 고인돌은 강화도 고려산 북쪽 봉우리인 시루메산의 능선 자락 끝부분에 형성된 대지상에 위치해 있다.

대형 판석형 상석의 중앙부 아래에 2개의 대형 지석이 고여져 있다.

지석을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상석을 지면과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부근리 고인돌의 경우 1만 명 이상이 동원돼 한 달 가량 노동 끝에 완성됐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청동기 시대 이전에 국가가 조성됐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이 만한 크기의 돌덩이를 가져 올 만한 곳은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려산 자락밖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따라서 고인돌 제작에 연인원 1만 명이 동원됐을 것이고 이들의 가족 등을 따지면 약 5만 명 이상의 부락이 이 일대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전체 인구를 비교할 때 5만 명 이상이면 지금의 국가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선사시대 강화도 일대를 중심으로 우리가 모르는 조상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사회를 이뤘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의 한 페이지만은 아닌 듯 싶다.

일제는 철저히 부근리 고인돌을 국가형성의 배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의 내용처럼.

 

화문석

고려시대부터 시작돼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한 강화도화문석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무늬와 더불어 땀을 잘 흡수해 여름철 거실 접빈용으로 사용되던 우리 조상의 민예품이다.

재료는 강화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순백색의 왕골을 주로 사용하는데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고드레돌을 정교하게 넘겨 엮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왕골은 방동사니과에 속한 식물로 5월 말 심어 8월 초 따는 것으로 길이는 120~150cm 정도다.

아직도 아낙들은 왕골을 쪼개어 건조시킨 다음 다시 물에 불려 칼등으로 훌터 낸 뒤 햇볕에 말려 화문석을 엮어 낸다.

화문석을 매기 위한 문양으로는 대표적인 것이 학무늬, 오리무늬, 봉황무늬 등이 있으며 인삼, 나비, 호돌이 등 최근에 개발한 무늬도 많이 사용된다.

그 옛날 강화도의 여인네는 시집가기 전 화문석을 짜 결혼비용을 마련했고 시댁에선 화문석으로 자식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초지진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다.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즈) 극동함대 및 고종 12년(1875)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 데 비해 우리 군은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안 되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에 대항했다.

특히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으로 인해 고종 13년(1876)에 강압에 의한 강화도 수호조약을 맺어 인천, 원산, 부산항을 개항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된 치욕의 현장이다.


국방유적으로서의 초지진

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사적 제225호로 지정돼 있으며 김포시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으로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 포인 진남포대가 있다.

병인양요를 비롯해 신미양요 및 일본 군함 운양호 침공 등 근세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천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할 때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해 덕진 광성의 제진을 공략했다.

또 1875년엔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강화도 조약의 시효진이기도 하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지금도 남아있어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전 함대에 맹포격을 가했던 대포 일문이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에 옛 모습 그대로 옮겨져 사학가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대포는 길이 2.32m, 입지름 40cm의 거포로 일정때 일본 모 고관이 뜯어다 자기 별장에 기둥 밑받침으로 사용했다.

해방 직후 고 장택상 씨가 보관하다가 그의 아들이 초지진 복원 소식을 듣고 기증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남게 된 유서깊은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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