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는 요즘 신도시 건설과 옛 도심 재생사업 등 각종 개발붐이 일면서 논과 밭이 아파트촌으로 바뀌고 회색빛 도시에는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등 도시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섬마을 속의 또 다른 섬마을 강화 교동도는 마치 요술에 걸려 시계추가 멈춰선 듯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멈춰서 있는 그곳 교동도. 매연에 찌들고 스트레스가 쌓인 도시민들이 이곳을 우연히 찾았다가 생기(生氣)를 맘껏 충전해 간다.

자연과 함께 변화를 거부하는 교동도는 도시민의 몇 안 되는 안식처 일지도 모른다.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배에 15분쯤 몸을 맡기면 교동도 외포리 선착장에 닿는다. 차로 10여분쯤 들어가면 대룡시장이 외지인을 반갑게 맞는다.

▲ 교동 대룡리시장
교동도의 ‘명동’격인 대룡시장은 6·25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주축이 돼 발달된 곳. 빠른 걸음으로 10여 분이면 대충 훑어 볼 수 있는 이곳엔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1960~19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세트장 같은 시장 골목골목을 걷다보면 어느새 어린 시절 ‘골목길의 추억’이 그림자처럼 찰싹 달라붙는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더벅머리를 다듬던 이발소를 떠울리게 하는 `교동이발관’. 타일로 엉성하게 만든 세면장과 조루에 물을 담아 머리를 감겨주던 추억의 모습, 벽에는 수십 년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한 낡은 사진액자가 걸려 있다.

▲ 만물상
인근 만물잡화상에는 소화제를 비롯해 때수건과 이쑤시게, 숟가락, 고무장갑 등이 한데 엉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우스개 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500여m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엔 미장원, 세탁소, 신발가게, 이발소, 잡화상, 약국, 다방 등 없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학교를 마치고 할머니 분식집에서 군것질을 하려는 아이들과 서울 사는 큰아들 내외를 보기 위해 고운 색의 옷 한 벌을 사려는 아주머니 몇 분만이 전부다.

시장 끝자락에는 지난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교동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도심학교 한 학년 수보다 적은 100여 명이 전부. 교동초교 운동장은 교동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이기도 하다.

교동이발관을 운영하는 지광식(68)씨에게 어릴 적 교동의 모습을 물어봤다.

“열세 살 되던 해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교동도로 오게 됐지. 그 당시 이곳에는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 전쟁통이었지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지. 그래서 사람들이 대룡리 골목에 거적을 깔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어. 그때만 해도 지금같이 상점처럼 보이는 번듯한 건물은 없었지.”

▲ 교동이발관
한국전쟁이 끝나고 장사를 해 돈을 번 사람들이 초가지붕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1960년께 지금의 시장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고 기억을 더듬는 그는 그 이후로 별반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상점 이름만 바뀌었지. 그러다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정부에서 슬레이트를 지원해주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긴 했지.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초가지붕을 미쳐 뜯어내지고 못한 채 그대로 슬레이트를 얹는 바람에 아직도 지붕 끝에 지푸라기가 삐죽 나와 있는 건물들이 많아...”

▲ 교동 대룡리
그의 말대로 강화 교동도는 오래전에 찍어 놓은 ‘흑백사진’과 같다.

지난 1974부터 1978년까지 교동면 대룡리 조합장을 지낸 전종삼(70)씨는 변화가 달갑지 않다.

“6·25 한국전쟁이 나고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꽤 많았었지. 언젠가는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한 거였어. 그러나 지금은 몇 사람 남지 않았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이곳 생활이 힘들어 육지로 나간 사람들도 많고...”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 만큼이나 이곳을 떠난 많은 이웃을 배웅했을 그의 어깨가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그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거야. 최근 이곳에 ‘연도교가 놓여진다, 개발이 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발빠른 외지인들이 땅을 사는 등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우린 다른 것보다도 그저 주거환경만 좀더 빨리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야.”

촌로(村老)에겐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부동산 광풍(狂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하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룡리에는 집에 화장실이 따로 없어 공동화장실을 사용했었지. 요즘 들어 이곳에 놀러오는 외지사람들은 옛날 모습이라 좋다고 하기도 하지.”

그는 편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옛것을 쉽게 버려서도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개발이 돼 생활이 편해지는 것도 좋지만, 바뀌고 버려지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어. 낡아빠졌다고 무조건 버리면 안 되는 거야. 거기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묻어있는 거니까...”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큰 섬 강화 교동도는 백령도보다도 면적이 넓다. 교동도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고림(高林)’, 고구려 때는 고목근현이라고 불려오다, 신라 경덕왕 때 교동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광해군이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동안 역사와 문화 유적지가 풍부한 강화도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군(軍)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빠르면 올 연말쯤 교동도에 강화도와 연결되는 연도교 건설사업이 첫 삽을 뜰 것이란 게 지역 주민들의 전언이다. 연도교가 완공되면 인구증가와 함께 각종 개발 및 투자가 활발해질 것은 불보듯 하다.

시계추가 멈춰 있던 이곳 대룡리의 시계도 이 때쯤이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개발이란 미명 아래 버려지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보존될 수는 없을까. 소박한 시골인심과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삶의 터전 등은 지켜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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