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인선 협궤열차에 몸을 싣는 시민들의 모습 <철도청 자료사진>
“내 기억 속의 수인선은 처음 `뽁' 소리가 나면서 시커먼 연기를 내던 증기기관차지.”

기억 저편의 추억을 찾아 떠난 수인선 여행 중 소래역사 인근에서 만난 황석암(66·인천시 남동구) 할아버지는 안산에서 인천까지 수인선열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그때는 기차를 타야만 인천이나 수원을 갈 수가 있었거든. 아침에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승강장이 빽빽했는데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차장이 깃발을 흔들면 출발을 했어. 멀리서 기차를 타려고 뛰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출발을 하지 않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곤 해 기차 도착시간이 늦어지기도 했지. 지금은 뭐 그런 거 상상이나 되겠어?”

황 할아버지는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수인선 만이 갖고 있던 일상을 소개하며 수인선의 추억을 이어갔다.

▲  송도역사의 모습 <철도청 자료사진>
“기차를 타려면 역에서 차표를 끊고 탔어야 했는데 급할 때는 그냥 타고 차장에게 돈을 내기도 했지. 그때 통학을 하던 학생들 중에 뜀박질을 잘하던 녀석들은 기차가 천천히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기도 했어. 그걸 우리는 '쌔벼차타기' 라고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험한 짓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시속 300km의 초고속 열차가 다니는 요즘시대 사람들은 언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꼬마열차'로 불렸던 협궤열차를 한 번이라도 타본 사람들만이 열차 안 승객들의 모습과 객차 안 풍경을 아마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수인선은 일제가 경기도 이천, 여주 지역의 쌀과 소래, 어천,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원역~남인천역(지금의 중구 신흥동)간에 설치, 반세기 넘도록 인천~수원간 해안 주민들의 발이 되어 삶과 애환을 실어 날랐다.

▲ 지금은 멈춰버린 협궤열차 내부 풍경, 수북한 먼지가 흐른 세월의 아쉬움과 함께 쌓여 있는 듯 하다./최종철 기자
열차 한 량은 시내버스보다 작고 볼품도 없었지만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수원~인천간 지역 주민들에겐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다 산업화, 도시화 물결에 밀려 운행 58년만인 지난 1995년 12월 31일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수인선 협궤열차의 폭은 표준궤도의 절반인 762mm에 불과했다. 작고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 등지에선 승객이 내려 걷거나 열차를 밀어야 하는 등 웃지못할 일도 자주 일어났다.

건널목에서 일어난 협궤열차와 화물트럭과의 충돌 사고는 지금도 수인선을 이용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수인선 열차는 달릴 때 심하게 흔들렸다. 객차 내 폭이 2m 남짓해 덜컹거릴 때면 맞은편 승객과 무릎이 닿기도 했을 정도여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화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협궤열차가 보관돼 있다는 철도박물관으로 향하던 중 부곡차량승무사업소에 당시 수인선을 운행하던 기관사가 근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서 만난 머리가 희끗한 베테랑 철도기관사 유판길(57)씨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당시 수인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 중앙역사의 모습./최종철 기자
“그때가… 1979년도일 거야. 내가 군 제대 후 다시 복직해서 수인선 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한 것이 말이야. 주로 장날 장꾼과 마을사람, 통학생들이 많이 탔지. 열차 운전석이 지금의 전철이나 열차처럼 객차하고 분리돼 독립된 공간이 아니었어. 객차 앞 뒤쪽으로 운전대가 있어 승객들하고 한공간에 있었던 거였어. 그래서 그랬는지 승객들 하고 재미난 일들도 많았어.”

유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수인선 협궤열차안에서 일어난 재미난 비화를 소개해 나갔다.

“그 중 하나가 가끔 열차가 지연이 될 때였어. 그건 열차가 중간에 고장이 나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운행 중에 역과 역 사이 중간쯤에서 승객이 아프다고 하던가, 막차일 경우에 역에서 내리면 캄캄한 밤을 한참동안 걸어가야 하는 승객들의 경우에는 그냥 중간에서 내려주는 경우도 있었거든. 지금시대에서는 볼 수가 없는 정말 인간미 넘치는 모습들이었지.”

요즘처럼 각박한 현대생활에 그러한 모습들은 정녕 인간미가 물씬 넘치는 시대상이 아닐런지.
수인선 역 가운데 유명한 곳으로는 단연 소래역이 꼽힌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서는 물론 가족과 함께 정겨운 나들이를 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 고즈넉한 삶을 함께 싣고 달렸을 수인선의 철길은 이제 추억과 함께 그 흔적만 남아있다./최종철 기자
주부들은 밑반찬으로 식탁에 올릴 조개젓이나 새우젓, 밴댕이젓 등을 사기 위해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를 찾았다.

그리고 1992년 7월 송도역~소래역간 열차운행이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송도역 주변엔 협궤열차를 타고 농수산물을 파는 아낙네들의 ‘반짝시장'이 유명했다. 소래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수산물과 인근 농촌에서 가꾼 각종 채소들을 협궤열차에 싣고 올라 송도역 앞에서 장을 벌인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아련한 추억이다.

수십 년을 인천과 수원을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왔지만 아스라이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진 수인선 선로를 따라 퍼즐의 그림을 맞추는 송도역을 출발해 소래역을 지나 몇 개의 간이역이 있던 자리들을 찾아가며 군데군데 흙더미속이나 풀밭 속에서 보이는 가느다란 선. 기차가 멈춰버린 철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흔적일 뿐 더 이상의 길일 수는 없었다.

최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던 수인선을 일부 구간을 변경해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물론 협궤열차가 다닐 철길은 아니다.

새 열차가 본격적으로 수인선을 운행하면 이로 인해 인근지역이 발전되고 도시민들의 열차 이용이 편해지겠지만 옛 시절 차창 밖 풍경과 생선과 과일을 짊어지고 장사를 나가던 아낙네들이 사라진 수인선은 비릿한 갯내음으로 진동하는 소래포구와 함께 세트를 이룬다 해도 그 시절만큼의 큰 감흥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 그 열차의 기억은 땀 흘리며 애환의 삶을 지탱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나 살아서 숨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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