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같은 나이, 같은 경인기차 통학생으로 같은 문학청년이었으나 우현(又玄)에 비하면 진우촌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모르고, 너무 소홀하다. 『인천시사』에서도 생몰년(生沒年)조차 미상(未詳)하다는 투로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 현대 희곡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대 초·중반의 희곡사의 한 켠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 유치진(柳致眞)에 버금가는 연극인, 시인이었다면 다른 고장에서는 벌써 비(碑) 하나쯤 섰을 터인데 여기서는 이름을 밝혀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제대로 없다. 고작 이 지역 역사, 문학사를 연구하는 몇 사람 학자뿐이다.

“진우촌은 인천 태생으로 본명은 종혁(宗爀)이고 우촌은 예명이다. 일본 물산장려회 희곡 작품 모집에 응모한 희곡 「암탉」이 당선되어 희곡작가로 등단하였다. 조부 학명(學明)이 구한국 시대의 관비 유학생으로 도일(渡日)한 바 있었고, 부친 진수(秦秀)는 1895년 신학제(新學制) 포고와 함께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인천해관(仁川海關)의 통역을 맡아 했다. 1926년 배우이며 연출가인 정암(鄭岩)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元雨田), 언론인 고일(高逸)과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설립하여 향토 연극운동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동인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간행하기도 했다. 8·15광복 후에도 극단 <고향>을 창단하여 활동했다. 작품으로 「암탉」「두뇌수술」 「춘향전」(각색), 「피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인천시사』의 기록이나 참으로 소략(疏略)하다. 그의 가계(家系)는 두고라도 1920년 전후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그리고 모교 배재고보 학생들의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등 그가 몸담았던 단체 활동이나 인천소성노동회에 참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문단에 등단한 경위 역시도 소상하지가 않다. 인하대 윤진현은, “1923년 5월 동아일보 1000호 기념 작품 공모에 「개혁」이 당선되어 등단한다. 이때 동화부문에 「의조흔 삼남매」도 아울러 당선되었고 이어서 9월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작품 공모에 「시드러가는 무궁화」가 또 당선되니 출발은 매우 화려하였다.”고 시사와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사에서, 처음 시험으로, 현상 각본을, 모집하야, 수백 편의 각본을, 보게 되얏스나, 그 전부가, 거의 각본의 형식을, 차리지 못한 데에는, 비록 무명씨의 작품이라 하겟지만, 적지 아니한 낙망을 하얏다. 나는 그 성적을 보고, 조선 극계의 장래가 묘연한 것을, 늣긴 동시에, 배우보다도, 자본보다도, 각본가의 출생을 간절히 비럿다. 그리고, 진종혁 군의 『시드러가는 무궁화』1편을, 겨우 발견하얏다.”는 1923년 12월 김운정(金雲汀)이 『개벽』에 쓴 「극계 일 년의 개평(槪評)」을 통해 극작가 진종혁의 등장을 알 수 있다. 그의 동료 고일(高逸)의 기록도 자세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내용을 보인다.

“진우촌이 극작가로 진출한 것은 물산장려회의 희곡 현상 공모에 입선된 후이며, 함세덕은 그 후에 등단한 신진 극작가였다. 진우촌은 문예지 『습작시대』를 인천에서 발행했는데 박아지(朴芽枝), 엄흥섭(嚴興燮) 등이 호응하였고, 김도인(金道仁)이 그 후에 종합 문예지 『월미』를 펴냈다. 인천의 각종 소년, 청년 단체와 노동 단체 등에서는 소인극(素人劇)을 여러 차례 공연하였고, 기독교의 엡워드청년회에서도 성극과 동화극을 지도했었다.”

특히 이 『습작시대』는 우리 인천 최초의 문학동인지가 된다.

▲ 진우촌의 대표희곡 '구 가정의 끝날'
극작가가 된 진우촌은 1925년 2월에는 초기 작품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구 가정의 끝날」을 발표하고, 이어 1926년 5월 31일과 6월 3일 이틀간에 걸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를 게재한다. 그리고 1925년 7월에서 1926년 10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14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1928년 5월 경남 진주에서 발간된 『신시단(新詩壇)』 창립 멤버로도 활약하지만 이 잡지 창간호가 일제에 압수되는 등의 곡절도 겪는다.

남아 있는 시 작품 중에 1927년 7월 간행된 잡지 『동광』 15호에 실린 「바다가에서 올닌 기도」 「반성-단오날에」와 16호의 「님께 받은 마음」을 볼 수 있다.

님을 배반한 인간에게
님께 받은 그 맘을 자랑한 어리석음은
실망과 자폭의 술ㅅ잔을 들어
남모를 원한을 위로하였다.

아아 그러나 님을 시긔하는
이 땅의 노래와 웃음의 유혹이
한 많은 나의 술ㅅ잔을 취ㅎ게 하였나니
님께 받은 그 맘은 더 한겹 더러웠도다.

아아 이 날에 맑은 강물에
그 맘을 씻은 옛 사람을 본받아
이제 나도 나의 더럽힌 마음을
님께 받혀 다시금 씻으려 한다.

이 노래를 가장 친애하는 벗 박아지(朴芽枝)께 올린다.

-「님께 받은 마음」부분

여기에 나오는 박아지라는 인물이 곧 고일이 언급한 <습작시대>의 시인 박아지일 것이다. 이렇게 진우촌은 인천에서, 또 우리나라 연극계와 문단에서 적지 않은 활약을 한다. 인천에서는 등단 직후인 1926년 연극단체 <칠면구락부>를 결성한다.

“<칠면구락부>에서는 진우촌이 각색하여 공연한 「춘향전」「칼멘」「사랑과 죽음」 이외에 수많은 작품을 각색, 연출하였다. 무대 장치는 원우전, 연출은 정암, 각색은 진우촌과 필자가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작품인 「눈물의 빛」을 「가무기좌」에서 공연할 때, 주연 송수안 군이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고, 무대 뒤로 숨은 일이 있었다. 각 신문사가 후원한 만큼 입추에 여지없는 초만원 속에 첫 막을 열었었다. 진우촌이 배경 뒤에서 극본을 크게 읽어 주었건만, 송 군은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가,

‘여보게, 변소가 어딘가? 나, 소변 좀 보고 옴세…….’

송 군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져서 영영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대역을 맡아 본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시국 강연을 한 바탕하였고…….”

고일이 쓴, 두고두고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 이 해프닝의 주인공들은 지금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20대 초반이었던 이 무렵이 아마도 진우촌의 황금기였을 것이다. 1927년 1월에는 '아동문학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꽃별회>를 경성에서 창립하는데 여기 회원으로 박동석(朴東石), 김도인(金道仁), 한형택(韓亨澤) 진종혁(秦宗爀) 등의 인천 문인과 강서(江西) 유도순(劉道順), 그리고 경성의 최병화(崔秉和), 안준식(安俊植), 강병국(姜炳國), 노수현(盧壽鉉), 주요한(朱耀翰) 양재응(梁在應), 염근수(廉根守) 등이 주축을 이룬다.

그러나 모든 것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1928년 12월 18일자 신문기사는 그가 창간한 잡지 『신인(新人)』도 일경에 의해 압수당한 사실을 보도한다. 경성에서의 발간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조선출판경찰월보(朝鮮出版警察月報)』 제4호 「출판경찰개황(出版警察槪況)」에는 그의 잡지 『신인』창간호가 “오늘날의 조선은 타라(惰懶)와 빈핍(貧乏)의 나라라는 내용” 때문에 배포 금지가 되고 만 것이다.

1938년 1월에는 '문인 극평론가 연극인들이 제휴하여 실천과 이론을 통하여 극의 예술성을 옹호하고자' 극단 <낭만좌(浪漫座)>를 결성하고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자신의 작품 「바다의 남편」을 공연하는가 하면, 이 해 2월 동아일보가 주최한 '호화의 연극「콩쿨」대회'에는 역시 <낭만좌>가 진우촌의 번안극 「함레트」를 가지고 참가하기도 한다.

▲ 진우촌 전집 표지
출생 일자가 1904년 7월 22일인 진우촌이 과연 인천 출생인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그가 율목리에 살았다거나 혹은 내리와 송현리로 빈번히 이주했었다거나 하는 기록들을 들추지 않아도, 그는 분명 인천사람으로 인천에 살면서 문학을 하고 연극을 했던 것이다. 인간사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되, 진우촌 일가는 1942년 서울 부암정으로 이주했으며, 이후 그의 행적이 기록된 것은 1946년 3월 13일 하오 1시 서울 종로 YMCA에서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 시 추천위원으로 이름이 오른 것과 1948년 12월 27일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초청대상 문화인 명단에 들어 있는 것뿐이다.

“김병호(金炳昊)군을 맛난 것은 1927년이엿든가 십다. <중략> 그리든 참에 어늬날 송도의 이성득(李聖得) 형이 진종혁(秦宗赫) 우촌(雨村) 군이 나를 찻는다는 바람에 이 형이 일러준 북본정인 최응렬(崔應烈)씨 댁으로 갓다. 그때에 아나키스트의 타입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 군이엿고 여성적으로 생긴 사람이 진 군이엿다. 그들은 창작가 엄흥섭(嚴興?) 군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왓다는 것이다.”

1933년 문병휘(閔丙徽)가 잡지 『삼천리』에 쓴 「문단의 신인·캅프」의 한 구절이다. 제대로 얼굴사진 한 장이 남아 있지 않은 인천 연극의 태두 진우촌의 모습이 이렇게 여성적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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