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천이 낳은 또 한 명의 유명 여배우 도금봉을 기억하는 사람도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이 쉰은 넘은 사람이라야 겨우 겨우 그녀가 배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역 연예사(演藝史)는 물론이거니와 『인천시사』에조차도 한 줄의 언급이 없으니, 그녀가 인천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따지자면 더욱 그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인천은 이 나라 어느 지역보다도 일찍 개화된 곳으로 정치, 학문, 연예, 스포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는 데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산 탓에 그 뿌리를 확인하기조차 어렵다. 더욱이 이렇게 세간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인천의 인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빨리 그 어둠을 열어 밝혀내야 하고, 두터운 망각의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그 옛날 인천서 이름 높던(?) 지일화예요.”

이 구절은 지난 호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지만 1959년 옛 《경인일보》가 주최한 「제1회 인천 출신 영화인 귀향 예술제」에 향토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초청된 도금봉의 첫 인사말이다. 《경인일보》는 여러 연예인들을 소개하는 기획 연재물 ‘봐 주세요’ 코너를 실었는데 여배우 황정순에 이어 그 다음날 두 번째로 도금봉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게재 순서가 정해진 것은 아마 도금봉이 데뷔도 늦었고 나이 또한 1930년생으로서 황정순보다 다섯 살이 밑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무렵 연예인 도금봉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던 듯하다. “타고난 미모와 늘씬한 자태”에 이른바 “세기의 요우(妖優)”라는 수식어가 증명하듯이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악녀의 이미지로 스크린”을 누빔으로써 ‘한국 가정주부의 표상이라 할 만큼 정숙한 이미지의 황정순’과는 정반대 캐릭터로서 회자(膾炙)되었다. 영화배우로서는 신인이었지만 데뷔와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최고의 인천 스타였던 것이다.

도금봉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여성영화인사전』에 나와 있는 공식적인 연보와 활동 기록 정도다. 그 외에 그녀의 성장기 같은 내용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인천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살았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고 학교는 어디를 다녔는지, 언제부터 악극단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영화계 데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따위의 궁금증에 대해서는 기록도 증언할 사람도 전무한 형편이다. 그녀가 건강하다면 인천 쪽에서 얼른 나서서 직접 구술(口述)이라도 들어야 할 것이다.

도금봉은 연보에 밝혀진 대로 1957년 영화 <황진이>에 일약 주인공 ‘황진이’로 데뷔한다. 그 이전은 앞에서 인용한 대로 “악극단에서 지일화로 자못 날리던 시절”을 구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정순이 1940년에 정통 무대인 연극 극단에 입단한 것과는 이렇게 데뷔 경로도 다르다.

   
 
“삼단 같은 거문머리를 비추 비녀에 말아 쪽 지고 치마를 비껴 처들고 오이씨 같은 보손발로 삽분이 들어서는 황진이의 매력은 뭇 남성의 간장을 녹였으니 도금봉은 팬들에게 미끈절사덕하게 잘도 생겼다는 인상을 깊이 주었었다. 인천의 팬들은 더욱 그러했다. ‘허- 누군가 했더니 그 왜 지일화 아냐?’ ‘내 어찌 인천서 못 햇던고…’ 자못 화제는 항도의 대방거리에 꽃을 피웠다.”

신문에서 인용한 이 기사 내용으로 보아 도금봉의 <황진이>는 아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 당시 이십육칠 세의 도금봉이 공교롭게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황진이>의 주인공 송혜교와 비슷한 나이로서 비슷한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뒤 또 한 번 히트를 친 영화가 1959년에 개봉된 <유관순>이었다.

“영화 <유관순>이가 코 무든 돈마저 동원하기에 이르러 세 살 난 어린애도 여배우 도금봉을 몰라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쏘냐…. 인천에서도 한창 적자투성이로 헤매든 어느 극장이 숨도 돌리게도 마련되었다는 소문이고 보면 유관순 덕택에 도금봉의 주(株)도 껑충 뛰어 올랐다고 말할 손가.”

1961년에는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 김지미와 ‘양귀비’ 역할 대결을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한다. 그 당시 동아일보에서 다룬 영화가 가십 내용이 재미있다.

“극동흥업에서 촬영을 개시한 <천하일색 양귀비>에는 도금봉이 출연하고, 한편 동방영화사에서 촬영을 개시한 <양귀비>에는 김지미가 분장, 바야흐로 양귀비의 싸움은 김지미 대 도금봉의 푸레이로 판갈이 될 것 같다.”

인천이 낳은 대배우 도금봉. 금년 77세의 이 원로 배우는 1960년대 이처럼 화려한 전성기를 지내고, 간간히 활동해 오다가 10년 전인 1997년 <삼인조>라는 영화에 전당포 노파 역으로 출연한 것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등대 불 번쩍이고 갈매기 하늘을 헤엄치는 항도 인천의 로맨티시즘을 타고났을 도금봉.”이라고 한 《경인일보》의 표현대로 도금봉의 일생은 열정과 영광과 화제와 시기와 고뇌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여성영화인사전』은 도금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금봉은 양분된 극단의 성격을 모두 지닐 수 있는 전능한 연기자다. 이를테면 욕망에 충실한 요부이거나 삶에 집착하는 순박한 아낙이거나 인생의 덧없음을 알아차린 듯 순간을 살아갈 뿐인 쾌락주의자이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억척스런 현실주의자이거나, 한 켠에는 <천하일색 양귀비> <목 없는 미녀>가 있고 또 한 켠에는 <유관순> <대심청전> <새댁> <또순이> 가 있다. 즉 양귀비와 요염한 귀신은 혁명투사, 심청, 순박한 새댁, 억척스런 또순이와는 퍽 대조적인 역이다. 이 두 극단, 그리고 두 극단 사이의 수많은 역들을 소화해낼 만큼 도금봉은 늘 에너지가 넘치는 연기파였다.

그에게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본명은 정옥순, 무대 예명인 지일화, 영화로서의 이름인 도금봉이다. 악극단 창공 시절 이미 연극계에서 명성이 높던 지일화는 우연히 조긍하 감독에게 픽업되어 <황진이>의 주연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기생으로서보다는 시인으로서의 황진이를 다룬 조긍하 감독의 <황진이>는 황진이의 일상 묘사를 중심에 둔 비범한 작품이다. ‘도금봉’은 이때 얻게 된 이름인데 황진이가 살았던 송도의 ‘도’와 가야금을 잘 탔다는 황진이의 일화에서 ‘금’을 가져왔고 영화계에서 우뚝 솟는 봉우리가 되라는 뜻에서 ‘봉’을 넣었다고 한다. 그녀는 <황진이>에서 보여준 열연으로 연이어 <황혼열차>와 아시아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된 <그대와 영원히>에서 주연을 맡을 수 있었고 해외 수출된 <황진이> 덕분에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타이완에 진출하기도 했다.

관능적인 황진이를 연기하면서 도금봉은 “세기의 요우”라고도 불렸다. 요염한 마스크와 풍만한 육체, 가실 줄 모르는 젊음은 그의 장점으로 여겨졌다. 당시 도금봉을 그런 이미지로 규정하는 데 일조한 것은 수많은 스캔들이었다. 데뷔 시절부터 도금봉의 주위에는 늘 염문이 떠돌았다. <중략>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며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던 사람들은 그런 흥미로운 뉴스거리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스캔들에 눈물 흘리거나 감추기에 급급했던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도금봉은 그런 스캔들에 냉소를 보내거나 오히려 공세적으로 대처했다.”

인용이 다소 길어졌지만 여배우이자 인간 도금봉의 면면이 여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밝고 환한 봉우리와 그 반대 깊고 어두운 계곡 아래의 밤. 그 같은 명멸(明滅)의 삶을 그녀는 꿋꿋하게 버텨 살아온 것이다.

이제 그녀가 영화계에 남긴 대강의 족적을 살펴본다. 출연 영화 500여 편, 1963년 제2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같은 해 4월 동경 아시아 영화제에서는 남우주연상 수상자 김승호와 함께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1972년 제 10회 대종상 여우조연상, 1974년 제12회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는다.

인천 출생 그 하나만 겨우 밝혀진 배우 도금봉. 그것만도 우리로서는 의미가 큰데, 이 만년의 여배우에게 우리는, 인천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가 영영 고향을 잊지 않고, 우리도 그녀를 절대 잊지 않는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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