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양문(表良文, 1907~1962)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고령층 인사들이라 해도 대

   
 
부분 그를 해방 후인 1946년 인천 부윤(仁川府尹)으로 출발해서 후일 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인천시장으로 재직했던, 그리고 인천에서 민의원에 당선된 바 있던 정치가가 아니면 행정가로나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초기 인천 문화계, 문학계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예술인이었다는 사실은 썩 잘 모를 것이다.

 “이 시기 또 하나 주목받은 동인회가 ‘시와 산문’ 동인이었다. 이 동인회는 후에 인천 문단이 이루어지는 맥락의 뿌리 중 일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양문(表良文)·함효영(咸孝英)·최태호(崔台鎬)·한상억(韓相億)·김차영(金次榮)·강춘길(姜春吉)·최병욱(崔炳旭)·이진송(李秦松) 등이 참가하여 모두 7집까지 간행하는 열의와 끈기를 보였다.”
 자주 인용하는 『인천시사』의 일절인데, 역시 “민족 문학의 수립을 표방하고 인천 문학의 대표성을 지닌 동인회로 활발한 활동을 펴 나갔다. 오늘날 인천 문단의 뿌리”라는 또 다른 필자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표양문이 해방 후 초창기 인천 문단 결성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7집’이라고 하는 것은 1946년 7월, 표양문이 주도해 만든 그들의 동인지 『시와 산문』의 호수를 일컫는 말이다. 지난 호 이인석 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1950년 5월 인천예총의 전신인 인천문총(仁川文總)이 처음 결성될 때도 표양문은 중심에 있었다. 6·25사변으로 활동을 중단했다가 9·15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이 인천문총을 인천문총구국대(仁川文總救國隊)로 두 차례에 걸쳐 재정비할 때도 그는 빠짐없이 참가했고 문총 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밖에도 표양문은 오늘날 인천 합창계의 밑거름이라고 할 '1952년 내리교회 성가대를 중심으

   
 
로 결성된 인천시합창단'의 명예단장이기도 했고, 1955년에는 인천국악원 초대 원장에 추대되는 등 인천 문화 예술 발전에 크게 공헌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표양문의 문필 활동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국사편찬위원회의 일부 기록과 동아일보에 그의 활동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동아일보에는 1929년 12월 6일부터 11일까지 6회에 걸쳐 「性과 思想의 鬪爭(Baelsche liebesleben der Nature)의 抄考)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글은 문학이라기보다는 학술적 성격이 다소 짙어 보인다. 그가 세브란스의전 세균학 교실 기사로 있었던 전력 때문인지 내용에서 정신 의학 냄새가 나는 것이다.

 문학적인 글이라면 1922년 잡지 『동명』에 발표한 「가을의 달밤」이 있고, 1930년 10월 26, 28일 이틀간에 걸쳐 발표한 「北漢의 頭蓋를 밟고」라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용기와 이상을 강조하는 수필류의 글이 있다. 특히 그는 소년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던 듯 「신기사도(新騎士道)-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의 진로(進路)를 밝힘」같은 논평을 1932년 10월 7일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어떠케 꾸짖을가, 동정을 가지고 동심을 이해하라」는 글도 역시 그런 아동에 대한 관심을 피력한 종류에 해당한다. 그는 1930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소년단 본부 이사를 맡고 있었고, 본부 이사회 개최나 소년군 훈련 상황이 일경의 시찰 대상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32년 11월 2일에는 「연주대상(戀主臺上)의 젊은 염원(念願)」이라는 기행문을 게재하기도 한다. 다작은 아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하게 문필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문예』지 1월호에는 「인천을 떠나며」를 발표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 그 원문이 소개되지는 않은 상태다.

 서울 출신인 표양문이 인천에 온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1934년 이후라고 추측될 뿐이다. 1934년

   
 
동아일보에 「어린이들을 어떠케 꾸짖을가, 동정을 가지고 동심을 이해하라」라는 글을 발표할 당시 표양문은 자신의 소속을 서울 용산건아원(龍山健兒園)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건아원이 어린이의 건강만을 보살피던 특수한 기관이었는지, 아니면 고아원 같은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인천에 오게 된 이유도 사실 문학이나 예술과는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세브란스의전 세균학교실 기사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인천항 검역소에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한국근현대인물자료』를 살펴보자. 이 자료에는 그의 학력을 ‘전문학교 검정 시험 합격’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 시험 합격’으로 밝히고 있다. 그의 경력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전문학교 검정 시험 합격, 세브란스의전 미생물학 기사(세균학교실), 교통국 기사(인천해항검역소), 미군 진주시 인천항 개항 책임 담당, 인천항만자치연맹위원장, 인천항부두국장, 인천항무청장 등을 역임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표양문이 세균학교실에 근무하게 된 것을 그의 큰형인 표상섭(表相燮)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상섭은 서울 용산구 용산공립보통학교 후원회장을 지내고, 표양문의 세균학교실과 관련이 있을 성싶은 ‘용산구 산수정(山手町)위생조합장’을 지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표양문의 ‘용산건아원’ 역시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36년 현재 ‘여러 가지 공사직’을 갖고 있던 큰형 표상섭의 후광으로 전공과 밀접한 인천항검역소에 1930년대 후반 이후나 1940년대 초반쯤 인연이 닿게 된 것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 무렵 인천항무청장으로 있었던 표양문은 1946년 초대 임홍재 부윤(府尹)에 이어 2대 인천 부윤에 취임하게 되고 1949년 행정구 개혁에 의해 인천시 승격과 동시에 인천시장에 취임한다. 그 외에 인하공대 이사, 인천시교육회 회장, 3대 민의원(지역구 경기도 인천 병구, 소속 정

   
 
당 자유당), 자유당인천지구당위원장, 문총 중앙위원 및 문총 인천지부 지부장, 경기도 인천교육위원회 의장, 국민회인천시지부 지부장, 자유당인천지구당 위원장, 자유당 중앙집행위원, 인하대학 이사 등 다양하면서도 벼락 출세식의 정치, 사회, 문화적 이력을 밟는다.

 “아직 전란이 계속 중이던 1953년 1월 10일 당시 시장인 표양문을 발행인으로, 부시장 최병환(崔炳煥)을 편집인으로 주간지 『인천공보』가 출범했다. 비록 인천시정을 시민에게 홍보함이 주목적이었으나 당시 정보에 주렸던 시민들에게 일반 기사를 제공하는 보도 기능을 일정 부분 담당했기 때문에 시정의 기관지 인천공보를 언론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천시사』의 내용대로 표양문은 이렇게 인천공보를 창간하고 제1호 서두에 발행의 변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천시의 기관지로 인천공보를 내어 놓는다. 인천시에는 일찍이 8·15 해방 후 미군정 시에 시발하여 과도 정부 시를 거쳐 대한민국 건립 시까지에 긍하여 주간인천이라 이름 지어 근 백호에 연하여 주간 기관지를 발행하고 있었든 것이다. 누차 시장이 갈리고 곧 6·25사변이 일자 그것이 정지되고 자연적으로 폐간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제 거하(去夏)에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 시의원들이 선출되고 그들은 시장을 선출하고 또 교육위원들을 선출하여 명실 공히 지방자치가 구현됨에 이는 민주주의 행정이요 곧 여론 행정의 기초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에 있어 인천시는 인천시민에게 시 행정을 늘 보고하고 호소하고 여론을 모집하고 비판을 감수하고 편달에 수긍하여 행정의 진로를 항시로 시정하여 나아가야 될 것이다.

 이제 인천공보를 간행함은 시 행정의 내용을 공표하고 전달하는 한편 시민들의 중성(衆聲)과 여망을 취급할 것은 물론이요 시의회의 의사의 기록과 의원 제씨의 활동 상황이며 그들의 의견을 발표하여 시민 제위가 잘 알도록 할 것이며 시를 운영하는 공무원들의 상호간의 지식을 계몽하고 친목을 도모하여 사무의 능률을 향상시키고자 함에도 또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특기할 것은 표 시장의 문학 성향이 이 인천공보에도 반영되었던지 ‘명작 소개, 시, 단편소설’ 등을 싣는 문학면이 있어 시민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점이다.

 비록 표양문이 문학가로보다는 정치, 행정가로 산 시간이 훨씬 많지만 초기 인천 문단 결성과 문화 예술계 발전에 헌신한 공로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오늘에라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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