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작가 함섭(61)씨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70년대 초에 한지에 관심을 가졌다가 잠시 유화로 돌아갔던 그는 80년대 들어 한지를 다시 주목했다.

서양화가가 한국화 또는 한국적 소재로 작업한 경우는 드물다. 서양화에 비해상대적으로 침체의 길을 걸어온 한국화였기에 더 그렇다. 함씨는 한국의 전통에서 독특한 예술세계를 찾아 가꾸고자 했다.

그의 한지작품을 선보이는 개인전(3월 6-15일)이 서울 청담동 박영덕화랑에서 열린다. 출품작은 '한낮의 꿈' 연작. 일장춘몽에 불과한 삶을 화면으로 노래하려 한다. 한때 '개꿈'이라는 제목도 생각했으나 본래 의도와 거리가 먼 선입견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전시품은 100호 이상의 대작이다.

함씨 작품에는 오방색의 다양한 울림이 있다. 거친 듯하면서도 소박한 색면은 잃어버린 고향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시골 머슴처럼 우직한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오톨도톨한 표면은 부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은 얼른 보면 마치 회화같다. 그만큼 색채대비가 분명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붓의 흔적이 전혀 없다. 종이, 풀, 솔이 작가를 통해 이뤄낸 개가라고 할 수 있다.

함씨는 종이와 안료, 풀 등 재료를 손수 만든다. 당연히 작업과정이 길고 고단하다. 종이의 경우 닥나무 껍질을 볏짚의 재와 함께 솥에 넣고 삶는다. 보통의 한지는 양잿물로 삶는데, 이럴 경우 산도가 너무 높아 양질의 종이를 얻어내기 힘들다.산도 35% 이하의 닥종이가 탄생하는 비결은 볏짚재에 있는 셈이다.

이렇게 태어난 닥종이를 황백, 치자 등으로 만든 천연안료에 담그면 알록달록한 오방색의 종이가 된다. 작품은 틀의 맨 아래에 삼겹지를 깔고 그 위에 닥껍질을 가로와 세로로 교차시킨 뒤 오방색의 종이가 휙휙 던져지며 완성된다. 색색의 닥종이를 구상에 따라 내던진 다음 솔로 두들겨대는 것이다.

작품에서 힘(氣)이 뿜어져 나오는 것은 종이를 던져 만드는 데서 비롯한다. 풀을 먹인 종이를 덩어리째 사각의 화면 틀에 던지거나 일정한 길이와 형태로 오리고꽈서 올리는 것. 경우에 따라 고서의 낱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 다음 솔로 숱하게 두들겨주면 표면이 반반해지면서 독특한 질감의 작품이 새롭게 태어난다. 크기 100호의 작품은 솔로 1만번 이상 두들겨 맞아야 완성된다고 작가는 들려준다.

전통 방식의 닥종이는 수명이 1천년을 헤아릴 정도로 매우 질기다. 이 종이들을 차례차례 포개놓은 작품은 천하장사가 찢으려 해도 찢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몇년만에 화면이 갈라 터지고 물감이 떨어지곤 하는 유화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함씨는 살아 숨쉬는 소재가 한지라고 말한다. 생명성을 지닌 이 종이는 작가를 만나 자신을 버리고 예술품으로 거듭난다. 무수히 두들겨대면 종이가 마모돼 그 형체를 잃은 뒤 생명을 새롭게 얻는다는 얘기다. 함씨는 이같은 탄생을 돕고 지켜보는 산파다.

그의 독특한 작업세계는 외국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199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아트페어와 99년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모두 판매되는 성과를 거둔 것. 이후 홍콩과 네덜란드에서 전시돼 한국의 푸근한 정서를 선사했다. ☎ 544-8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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