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학성
 #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과거(科擧)는 전근대사회에서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을 말한다. 한국사에서는 그 시원을 고려 광종(光宗) 9년(958)으로 보고 있으나 제대로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였다.

 조선왕조는 크게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잡과(雜科)의 3종류로 구분해 과거를 실시했는데 문과는 문관을, 무과는 무관을, 그리고 잡과는 의관(醫官)·역관(譯官)·율관(律官)·천문관(天文官) 등과 같은 여러 기술관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과거의 중심은 문과에 있었다. 조선시대 사람(양반)들은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시험 절차도 다른 과종(科種)보다 까다롭고 복잡했다. 즉, 문과의 경우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라는 이중의 시험 관문을 두었던 것이다. 소과는 대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을 따기 위한 일종의 예비시험으로, 이에 합격한 사람을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라 했다. 그래서 이를 ‘생진과(生進科)’라고 했으며,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했다. 초시와 복시 두 단계의 시험 과정을 거쳐 최종 생원과 진사 각 100명(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씩을 선발하는 것이 규정이었으니, 소과에 합격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합격자에게 친히 국왕이 주과(酒果)와 합격증인 ‘백패교지(白牌敎旨)’<사진 1>를 하사하고, 합격자들의 명부인《사마방목(司馬榜目)》<사진 2>을 작성·인쇄해 합격자와 관계기관이 보관토록 했던 것이다. 물론 소과에 합격해 생원·진사가 되었더라도 이것이 바로 벼슬은 아니었다.

▲ 생원.진사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
 벼슬을 하려면 대과에 급제해야만 했기에 대과를 바로 ‘문과’라고도 불렀다. 원칙적으로는 생원·진사에게만 응시 자격을 주었다. 초시와 복시 및 전시 세 단계의 시험 과정을 거쳐 최종 33명(갑 3명, 을 7명, 병 23명)을 선발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33’이라는 숫자는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수를 서른세 개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 따른 것이었다.

 대과 급제자 또한 국왕에게서 주과와 합격증 ‘홍패(紅牌)교지’<사진 3>를 하사받았으며, 예조에서 급제자들의 명부인 《문과방목(文科榜目)》을 작성·인쇄해 급제자와 관계기관에 나누어 주었다.

 요즘도 현장조사를 다니다 보면, 자신의 몇 대 조가 받은 것이라며 백패 및 홍패 교지를 내보이는 마을 노인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이처럼 빛바랜 종이를 수백 년간 소중히 보관해 오고 있는 것은 한 집안에 과거급제자가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 소과[사마시·생진과]에 합격한 인천사람들

 

▲ 김홍도가 그린 과거시험장 모습
인천지역(현, 인천광역시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인천·부평·강화·교동 등 4개 고을)을 거주지로 해 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총 288명이 확인된다. 생원이 117명(40.6%)에 진사가 171명(59.4%)이었던 것이다. 지역별로는 강화(江華)가 130명(45.1%)으로 가장 많았고, 인천(仁川)이 87명(30.2%), 부평(富平)이 68명(23.6%), 이밖에 교동(喬桐) 2명(0.7%), 영종(永宗: 鎭) 1명(0.3%) 등의 순이었다.

 한편, 각 지역별로 다수의 합격자를 배출한 5대 성관(姓貫)을 들면, 강화에서는 전주 이씨(13명)와 여흥 민씨·파평 윤씨·청주 한씨·창원 황씨(이상, 각 8명) 등이었으며, 인천에서는 전주 이씨(13명)와 파평 윤씨(8명), 평창 이씨(6명), 원주 변씨·부평 이씨·연일 정씨(이상, 각 4명) 등이었다. 그리고 부평에서는 전주 이씨(12명)와 진주 류씨(10명), 해주 정씨(6명), 의령 남씨(5명), 청주 한씨(4명) 등으로 나타났다.

   # 대과[문과]에 급제한 인천사람들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인천사람들은 총 57명이 확인된다. 인천이 20명, 부평 13명, 강화 19명, 그리고 교동 5명 등이었다.

 역시 각 지역별로 다수의 급제자를 배출한 성관을 살펴보면 인천은 평창 이씨(4명)와 전주 이씨·파평 윤씨(이상 각 3명), 부평은 진주 류씨(4명)와 안동 권씨(3명), 풍천 임씨(2명), 강화는 전주 이씨(4명)와 여흥 민씨(2명) 등이었고, 교동은 급제자 5명이 모두 각성(各姓)이었다.

 결국 소과와 대과 합격자들 가운데 거명된 몇몇 성관(가문)들이 인천지역의 양반사회 및 그 문화를 주도해 나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명문(名門)이었던 것이다.

 한편, 인천지역의 대과 급제자 가운데 매우 특이한 인물이 있다. 고종 3년(1866) 강화에서 치러진 특별 대과시험에서 급제한 이건창(李建昌)이다. 출생년도가 1852년이니 급제 당시 만 13세에 불과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대과에서의 최연소 급제 기록에 해당한다.

   # 소과와 대과에 모두 합격한 인천사람들

 그러면 인천지역에서 소과(생진과)에 합격한 288명 중 과연 몇 명만이 대과(문과)에 급제했을까? 확인해 보았더니 총 18명이었다. 지역별로는 강화 거주자가 3명, 인천과 부평 거주자가 각 7명, 그리고 교동 거주자가 1명이었다. 이 18명이 차지하는 비율은 282명의 6.4%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소과 합격을 거쳐 대과에까지 급제한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든 일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근래 들어 대학생들마다 전공과 관계없이 오로지 고시에만 온 힘을 기울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학문의 요람이어야 할 대학이 마치 ‘고시 준비학원’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이 들린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가 총인구 대비 대학생은 많은데 학문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세태와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인천사람들을 살펴보다 보니, 언뜻 우리 현실이 오버랩되기에 덧붙여본 사족(蛇足)이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19) “조선시대 인천의 문화재”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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