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동 일대에 있었던 숙박시설(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이 아직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1897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됨)
2014년 아시안게임 인천유치가 결정되어 장밋빛 전망이 만발하고 있다. 아시아권에서도 유독 국제행사가 적은 편에 속하는 우리나라이고 보면 아시안 게임 인천개최 결정에 희망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국제행사를 치루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여러 시설 중에서도 인천을 방문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다. 이번 호에서는 개항과 더불어 국제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인천에 세워졌던 숙박시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호텔(hotel)의 어원은 라틴어의 Hospitable로 이 말은 Hospital, Hostel의 어원이기도 하다. 현행법상 우리나라에서의 호텔은 욕실 또는 샤워시설을 갖춘 객실이 30실 이상이며, 외국인에게 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서비스 체제를 갖추고 있는 숙박시설을 말한다.

  개항 이후 인천에는 여행자를 위한 여러 가지 숙박시설이 세워졌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 외에 스튜어드호텔, 한국호텔 등과 많은 일본식 여관이 있었다. 이를 세운 사람은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및 서양인으로 다양했으며, 그 종류도 한국식, 서양식, 일본식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숙박시설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전국 각지에서 인천으로 몰려온 우리나라 사람들만을 위한 숙박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형태는 객주, 주막이나 일반 주택 등이었을 것이다.

 

▲ 직업소개소.공동숙박소
숙박시설은 단순한 숙박기능 외에도 여러 가지 기능을 했는데, 대불호텔에는 커피를 팔기도 했으며, 피아노와 당구대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역업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던 상사로 중구 신포동에 위치한 ‘만취동(萬聚東)’이 있었다. 이 회사는 무역업 외에 숙박시설과 술집 등의 오락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환전 및 기차표 구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오는 사람은 여기서 2~3일은 묵었다고 전한다. 이 무역회사는 해방 직후 남한 최대의 중국인 상사로 발전했지만, 인천 최고의 탈세를 하고 외국으로 달아나 종적을 감추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공동숙박소를 겸한 직업소개소가 있었다. 이 시설은 1920년 8월 5일 현재의 송림초등학교 터에 설립해 중구 율목동 58번지에서 사업을 계속하다가 1932년 1월 8일 중구 내동 84번지(현재의 스카이타워 옆)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목조 슬레이트 지붕의 1층 204.1㎡와 목조 슬레이트 지붕의 2층 건물이 있었으며, 부속 건물로 목조 슬레이트 지붕의 23.1㎡ 건물이 있었다. 내부공간은 대기실, 사무실, 응접실, 구직자 대기실, 숙사, 온돌방(4실), 다다미방(2실), 욕실 겸 세면실, 화장실, 식당, 취사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수용인원은 50명 정도였다. 한편, 1899년에는 여관영업단속규칙이 발포되기도 했다.

      # 대불(大佛, 다이부츠, Daibutsu)호텔

 

▲ 건립초기의 대불호텔 모습(사진의 가장 오른쪽 건물이 대불호텔이며, 간판에 Hotel Daibutsu라는 글자가 있다)
호리(堀久太郞)가 1888년에 건축한 호텔로 객실 수는 총 11개에 불과했으나 개항기 외국인이 자주 이용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개점 이후 성황을 누렸지만 1899년 9월 18일에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업이 곤란하게 됐다. 이후 1918~19년경 중국인 레(賴文藻;뢰문조)에게 매도되어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로 사용됐다. 이후 1978년에 철거되어 현재는 빈 터만 남아 있다. 초기에는 2층으로 세웠다가 후에 3층으로 증축했으며, 증축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옛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이 세워지기 전의 시가지 사진에 이미 3층 건물인 것으로 보아 1899년 이전에 증축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후에 세워진 건물은 벽돌조 3층으로 연면적은 737.2㎡이었다. 객실은 총 11개로 1층과 2층에 주로 배치했고 3층에는 홀을 두었다. 3층 홀에는 벽난로와 청동세부장식으로 치장을 했다. 건축자재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1층에는 난간이 있었으며, 그리스식 페디먼트로 입구를 강조한 절충주의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또한 외관을 금색으로 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화루로 사용될 당시에는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식 기와로 마감한 지붕상부에는 크레스팅으로 장식했고, 초창기에는 지붕에 도머창을 설치했다가 나중에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주 : 대불호텔 건립 연도에 대해서는 1888년 호리리키 다로(掘力太郞)가 벽돌 건물로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제물포를 방문했을 당시 대불호텔에 묵었다는 비망록의 기록을 봐서 신축되기 이전에도 일본식풍의 대불호텔이라는 이름의 호텔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스튜어드호텔(Steward Hotel)

 지금의 중구 선린동 10-5번지에 있었던 호텔로 정확한 건축연도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기록을 근거로 판단할 때 대략 1886~8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식 기와를 올린 모임지붕 3층 건물로 정면은 5개의 베이(bay)로 구성되어 있었다. 1층 출입구 부분은 건물을 약간 앞으로 돌출시키고, 상부에는 별도의 지붕을 설치해 현관을 만들었다. 외관상 2, 3층에는 객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호텔의 1층은 서양 잡화점을 취급하는 상점이 있었고, 2층은 객실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진에는 3층 건물이다.

     # 한국호텔(Hotel de Core, Steinbeck's Hotel)

 각국거류지에서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h)이 운영했던 호텔로 정확한 위치와 건축연도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각국거류지에 있었다는 내용과 이 호텔이 세워지기 전에 대불호텔과 스튜어드 호텔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890년 이전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한 것으로 보아 대략 1887~88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인천호텔과 인천구락부
  # 인천호텔

 제물포구락부의 원래 자리에 세워졌던 서양식 목조로 된 3층 규모 호텔이다. 이 호텔은 일본인 하시모토(橋本信吉)가 1907년에 세웠다. 2층은 일본인들만의 사교클럽인 인천구락부로 사용됐으며, 3층에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이 있었다. 나중에는 월미도 유원회사의 호텔로도 사용됐다. 이 호텔은 외벽을 목조 비늘판벽으로 마감했으며, 창문에는 오르내리창을 달았다.  건물 전면에 덧붙여 달아 낸 발코니 부분에는 거의 모든 부분을 유리로 마감했다. 이곳에서는 인천항을 조망하면서 식사나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아사오카(淺岡)여관

▲ 아사오카여관
 이 여관의 위치는 중구 관동 1가 중구청길 76이며, 현재는 빌라가 들어서 있다. 요리점으로 출발한 이 여관은 야사카(八坂)루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손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인천에 올 때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을사보호조약체결(1905년 11월 18일)을 강제로 추진하면서 서울에 머물던 이토가 1905년 11월 14일에는 인천까지 와서 이 여관에 숙박하기도 했었다. 일본성의 텐슈가쿠(天守閣)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일본식 목조 4층 건물로 1~3층에서는 층 사이에 눈썹지붕을 설치했다. 3층 지붕측면에는 두 개의 박공을 달았고, 4층 지붕은 4면을 모두 합각지붕처럼 보이도록 했다. 건물외부는 살창이나 목재난간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유리창을 달았다. 이 당시에 세워진 대부분의 일본식 여관들이 3층 이하이었다는 점에서 이 여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 하나야(花屋) 여관

 일본인 오오쿠사(大草)가 중구 중앙동 1가에 세운 여관으로 대불호텔 길 건너편에 있었다. 일본식 목조 3층 건물로 2, 3층으로 가면서 건물면적을 체감해 탑 모양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주택이 들어서 있다.

   # 아사히야(旭屋)여관

 사사키겐고(佐佐木源吾)가 1905년 4월 인천에 와서 개설한 여관으로 그 위치는 현재의 중구 사동 3-1번지로 인천중동우체국 건너편에 있었다. 이 여관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그 자리에는 삼성생명 건물이 들어서 있다. 3층 규모의 일본식 건물로 합각지붕에 일본식 기와로 마감했다.

   # 스이쯔(水津)여관/수월루(水月樓)
 
 

▲ 스이쯔(水津)여관
스이쯔(水津淸三)가 세운 것으로 속칭 스이쯔(水津)여관이라고 했다. 최초의 일본인 민단사무소(중구 관동 1가 14번지) 후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불호텔의 고객이 주로 서양인들이었던 것과 달리 이 여관의 고객은 일본인이었다. 이 여관은 대불호텔과 더불어 쇠퇴했으며, 철거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33년 당시에는 빈 터였다. 축대 위에 세워진 여관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여관이 대부분 3층이었던데 비해 2층 건물이었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30) “국제도시로의 변화(7)”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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