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300년까지, 그리고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는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한반도에 남북한을 합하여 모두 4만여 기의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는 약 1만4천 기(基)가 있다고 제시되고 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은 1950년 6·25전쟁이 없었으면 이 나라에 적어도 8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철기시대 종료 시기(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축조됐으며, 이러한 고인돌 문화는 일본의 구주(九州)까지 전파됐다.

고인돌은 거석(巨石) 기념물(Monument Megalithique)에 속하며 이 거석 기념물에는 고인돌(dolmens)과 입석(선돌 立石 Menhirs)이 포함된다. 고인돌은 신석기시대 중기(약 기원전 3,000~4,000년 전후)때부터 북유럽에서 시작되어 서구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표지적 고인돌이 있으며, 북아프리카와 인도에서도 확인되고 있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우리 한반도가 가장 대표적인 거석 기념물을 가지고 있다.

고인돌(支石墓) 그리고 외래어로서 돌멘(dolmens)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 용어이며, 선돌(立石, Menhirg) 역시 브르타 지역의 고유 명칭이다.

1953년에 출판된 프랑스 대학 출판사의 “고인돌과 선돌(Dolmens et Menhirs)”의 책(764번)의 서문 7페이지 중간에 한국(en coree)에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고인돌과 선돌이 있다는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 한 학자가 18세기에 프랑스의 고인돌과 선돌은 프랑인들(골족)이 제작한 것으로 이러한 거대한 돌들의 무덤을 “골족의 기원”(Origines gauloises)라고 제시하고 있다. 나도 이 생각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반도의 고인돌과 선돌은 예맥(濊貊)족, 즉 우리 직접 조상이 제작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우리가 철기시대부터 중국으로부터 중국의 실용적인 문화를 받아들이지만 중족의 960만㎢의 거대한 땅덩어리 내에는 고인돌과 선돌이 1시(한 곳, 基)도 없다.
상기한 프랑스 책의 72페이지에 보면 한국의 고인돌은 오래전부터 알려졌으며, 한국의 강원도, 강화도와 서울 부근(북쪽, Ha-Heun)에는 지석묘의 지석(支石 또는 支柱 montants)이 각 20t이 넘으며 그 위의 상석(la table)은 6만㎏ 이상의 무게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고인돌의 특징의 하나는 상석의 두께가 보통 1m 이상이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첫째는 책상형이 북방식(北方式), 두 번째는 머리 돌만한 작은 받침돌 위에 상석(slab)을 올려놓은 변형 또는 남방식(南方式), 세 번째는 상석만을 지상위에 올려놓은 전형적 남방식 등 3종이다.

북방식은 전형적인 것으로 보이며, 이것들은 대동강, 임진강, 북한강 등 상류지역에 분포, 때로 한 곳에 100기 이상 집단을 이루고 있다.

상기한 3가지 중 책상형의 북방식은 기본적으로 2개의 받침돌(지석, 支石, uprights)을 수직으로 적어도 1m에서 70㎝ 정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묻은 다음 피장자가 평소 사용하던 물건을 매장하기 위해 받침돌 사이에 비표에서 아래로 30㎝ 두께를 정성껏 파낸 다음 매장물을 묻어 놓고 그 위에 다시 흙으로 덮고, 흙으로 덮은 위에 다시 편평하게 강자갈을 덮는 부석시설을 마친 후 2개의 수직 받침돌 좌우에 흙을 15˚~30˚ 경사지게 쌓아놓고 그 위로 상석을 올려놓는다. 상석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장방형으로 긴 방향(장축)은 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서 올려 놓았다. 책상형(북방식) 고인돌에 매장된 유물은 화살촉, 석검(돌검)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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