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변형 남방식은 지하에 주먹크기보다 조금 더 큰 강자갈로 관(棺)형태를 조성한 것으로 이것을 석곽(石槨)이라고 부르는데 석곽의 크기는 길이 약 2m×높이 50~60㎝, 너비 50~60㎝이다. 이 석곽 안에 피장자의 매장물로 석촉, 석검, 반월형석도(수확도구 半月形石刀)와 때로 청동검(靑銅劍)도 들어있다. 이 석곽의 뚜껑은 기본적으로 비교적 큰 판석(장방형, 크기 50~60㎝)으로 덮고 그 위에 흙으로 다시 덮은 후 사람머리보다 조금 더 큰 둥근 강돌을 3~6개 등 대칭적으로 놓은 후 그 위에 상석(slab)을 올려 놓는다. 이 변형 지석묘 아래의 시설물은 상기한 석곽묘 외에 길이와 너비 50~60㎝, 그리고 두께가 2~3㎝ 되는 판석으로 조립돼 만든 관으로서 이것을 석관(cist)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들어 있는 매장 유물은 상기한 석곽 내용물과 같다.

세 번째, 무지석(without uprights) 지석묘는 지하에 석곽 또는 석관을 매장하고 그 위에 상석 크기 정도의 면적 위에 약 20~30㎝ 두께의 돌을 덮는(부석시설) 과정을 마친 다음 상석(slab)을 그 위에 올려 놓는다. 이러한 무지석 지석묘는 특히 전라북도 고창, 전라남도 화순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때로 임진강 지역에도 드물게 확인되고 있다.

고인돌과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은 입석(Menhirs)이다. 우리나라의 것은 대개 높이가 5m 정도, 너비 약 1m, 두께 30~40㎝ 정도다. 입석은 고인돌을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것처럼 그 주위에 놓여 있으며, 선돌의 판은 기본적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한 것이 많이 있다. 유럽 지역에 있는 선돌의 가장 높은 것은 7~11m 정도, 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진 프랑스 카르냑(Carnac)의 선돌은 나란히 줄을 서서 길이가 4㎞ 정도이며, 선돌의 개수는 2천934개다.

우리나라 선돌이 묻혀있는 그 주위에서 극소수의 화살촉 등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고인돌은 기본적으로 죽은 자를 숭배하는(la culte des morts) 무덤이다. 넓은 들판에 선돌을 세워 놓거나 고인돌을 축조하는 것은 죽은 자의 집을 덮는 지붕(toit)으로 보고 있다.

임진·한탄강 유역(연천지역)은 고인돌이 약 50기 있으며 이 중에 북방식(책상형)이 내수를 차지하고, 변형과 무지석 지석묘도 있다. 2002년 상태가 좋지 않은 고인돌 18기를 발굴, 그 중에서 하부구조 시설(무덤방)이 확인된 곳이 약 5곳 축토 유물은 석검, 석촉, 가락바퀴, 반달칼, 석추(돌추), 무문 토기편 등이다.

18기 고인돌 중 진상리 1호와 2호 상석 상에 많은‘잔형표시’(Cup Marks)가 확인됐다. 이 컵마크는 임진강을 중심으로 서쪽 고인돌 상석에 비교적 많은 편이며, 이 마크에 대한 아직 철저한 연구는 아직 없으나 대충 별자리 표시(예, 북두칠성)로 보고 있다.

다만 인류 최초 무덤이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 라 훼라스(La Ferrassie)무덤, 약 기원전 4만 년에 해당되는 무덤에서 컵마크가 확인돼 컵마크가 무덤에 조각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73년 영국 캠부리 대학 출판사의 책 ‘고고학 배경’(Background to archaeology)의 페이지 16에 “석회암 판석에 누워있는 한 어린애 부근에 2개의 대칭적인 컵마크 또는 조각된 홈이 있다(Over one child lay a slab of limestone, on which were pairs of Small cup marks or carved hollows)”고 돼 있다.

연천 지역의 고인돌 상석의 암석은 현무암, 산성화성암, 운모편암, 규암, 화강편마암과 각섬암 등이다.

고인돌 축조 시 거대한 상석과 받침돌(지석)등의 채취는 일반적으로 암석 상의 균열(틈) 사이에 나무 말뚝을 끼워 놓고 일정하게 그 위에 물을 부어주면, 나무말뚝이 팽창 되면서 암석 상에 크게 균열이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 필요한 상석·지석 등을 채취했다. 그리고 채취된 상석과 받침돌을 정해진 무덤장소까지 옮기는 데는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동원돼 이때 이미 한반도에는 정착인들이 대단히 많았으며 정착인들이 농사에 집중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에 금속이 거의 없었으며, 철기시대(기원전 300년~기원 전후)에 이르러 쇠 도구를 이용해 암석 채취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음은 철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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