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통구(通溝)」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도성은 일반적으로 조선 평안남도의 평양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 한대(漢代)에서 당대(唐代)까지 700~800년의 고구려 도성은 3차례 이전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서기 2세기, 고구려 본거지 중국 동북의 요녕성 관내의 환인(桓仁)부근에 있었다. 환인은 옛 이름이 화인이며, 이곳은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혼강(渾江)의 중류 지역이다. 3세기~5세기(중국의 3국(三國), 서진(西晉), 동진(東晉)시대)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도성(국도國都)의 소재지는 환인의 동쪽, 같은 통화성(通化省)(구 안동성 중부), 즉 압록강변의 집안(集安)이다.

평양 수도 시기는 후기에 속한다. 즉 중국의 남북조~당초(南北朝~唐初)에까지 해당된다. 이곳은 고구려가 멸망될 때까지 수도였다. 5세기에서 7세기 중엽, 집안(集安)은 압록강 종류의 서안(西岸)에 위치, 환인, 통화와 임강 등과 함께 압록강 북변의 요지의 하나였다. 속칭 통구(通溝)는 동구(洞溝)로도 부른다.

통구에는 고구려의 고도(古都)로서 광개토왕비의 비석, 태왕릉(太王陵), 장군총 등의 무덤이 있다. 통구에 대한 학술조사는 1884년 일본 포병대위 주구경명(酒句景明)이 명령을 받고 조선 및 중국을 여행하던 도중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구에 이르러 광개토왕비의 탁본을 구해 온 것이 처음이다. 1889년 일본인 황정충직(禾+黃井 忠牛+直)이 아시아 협회 발행의 「잡지회여록 雜誌會餘錄」제5집에 《고구려비출토기 高句麗出土記》, 통구의 거대한 비(碑) 및 장군총에 대한 견문을 세상에 소개했다. 그 내용이 염정우의 「고구려호태왕비고 高句麗好太王碑考」, 나가통세(那珂通世)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好太王碑考」, 삼택광길(三宅光吉)의 「고구려고비고 高句麗好太王碑考」에 소개됐다.

성(城)은 환도성(還都城)과 국내성(國內城)이 소개됐다. 즉, 통구평야는 환도성(일명 국내성)의 소재지였다. 때로 통구성(通溝城)이라고 부르며, 1902년 집안(集安縣)이 세워지면서 현성(縣城)으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통구 지방의 유적은 일본인 조거(鳥居)가 조사했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통구성을 중국인들은 능안성(陵安城)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서 북서 방향으로 약 3천297m 지점에 산성자(山城子)라고 부르는 산성(山城)이 있다.

고구려의 무덤으로는 장군총, 태왕릉, 천추묘, 그리고 토분(土墳)으로는 오회분(五회(艸아래會)墳), 모두루총(牟頭婁塚) 등이 있다. 이중 모두루총은 압록강 상류 하양어두(下羊魚頭)라고 불리는 산 언덕에 산재된 10여 기의 작은 토분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주위에 환문총(環文塚), 동강(東岡)의 각저총(角抵塚), 오회분의 여러 토분 및 사신총(四紳塚)등이 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분, 즉 석총(石塚)과 토분(土墳)의 연대는 장수왕 15년(427년)을 전후해 그 이전을 석총시대, 평양천도 이후의 시대를 토분시대로 보고 있다.

소위 통구(通溝)하권에 벽화고분이 소개됐다. 무용총, 각저총, 삼실묘, 사진총, 환문총 등이다. 벽화는 석총 내부에는 없는 토분에 있다고 보았다.

일본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일제 강제 점거기에 활발히 진행됐다. 한무제가 세운 4군(四郡=진번·임둔·낙랑·대방) 중 진번군은 압록강 외부 동가강(人+冬佳江)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그 일대는 중국 전한(前漢)의 초제(目+召帝)의 시원5년(始元五年)에 고구려인의 점거, 고구려의 발전은 그곳에서 시작됐다. 그 후 고구려는 중국 후한(后漢) 공손씨(公孫氏)의 공격에 의해 동가강의 구도를 떠나 현 통구의 환도성으로 옮겼다. 중국 서진(西晋)말에 낙랑군을 병합,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시에는 영역이 확대됐으며, 장수왕 때 현재의 평양으로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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