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17대 소수림왕 2년에 전해졌으며, 소수림왕 5년에 성문사(省問寺)를 세우고, 그 후 이불란사(伊弗蘭寺)가 세워지고, 광개토왕 2년에는 9사(九寺)를 평양에 세우고, 문자강시에는 금강사(金剛寺)가 세워졌다.

당시 국도였던 통구와 평양 부근에는 도성지, 사찰, 무등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 부근의 평안남도 평원군 덕산면 원오리사지 등이 발굴됐으며, 평양 청암리 사지는 1938년 발굴됐다.

무덤은 집안, 통구의 평지에 있는 산성자(山城子), 유수림자(木兪 樹林子)와 평안북도 위원군, 초산군 등의 압록강 유역과 평양 부근에 대단히 많이 분포돼 있다. 이러한 무덤들은 일본인 관야(關野)등에 의해 조사됐다. 평양 부근의 고분은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跡硏究會)의 소장(小場), 소천(小泉)등에 의해 조사됐다. 특히 평안남도, 강동군 일토달산 고분에서는 금속제 유물과 토기 등이 출토됐다.

상술한 바와 같이 고분은 석총과 토분(또는 토총土塚)등으로 구분됐다. 벽화고분은 토총에서 보인다. 벽화가 그려진 곳(실 室)은 석실(石室)이며, 구조는 정사각형 또는 사각형이다. 토총의 석실은 거친 돌을 쌓거나 하나의 돌을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위에 2단 또는 3단의 굄돌을 놓고 그 위의 네 귀퉁이에 삼각형의 말각(抹角)을 쌓고, 정상에는 뚜껑 돌을 놓았다. 그리고 벽 위에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리거나 직접 그림을 그렸다. 벽화 내용은 당시의 풍속, 생활, 건축술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

당시에 알려진 벽화 무덤은 24기로서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9기, 평안남도 일대에 15기가 확인됐다.

일본인 등전량책(藤甸良策)은 「통구 通溝」상·하권에 통구분지의 고분, 수천의 대소분구(大小墳丘)가 사각형의 기초위에 세워졌다고 제시했다. 석총은 사각형이며, 2기 또는 3기가 나란히 놓여 직사각형의 터전(攄土+全)을 가지고 있다.

토분 원형을 찾기는 어렵지만 봉토의 흔적에 따르면 사각형으로 보고 있다. 즉 고구려 고분의 기본형은 토분과 석촉 모두 사각형이라고 보고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 각지의 고분은 소형 토분의 경우 원형에 접근되지만, 토분은 반드시 방대형(方坮형)으로 낙랑고분과 유사하다.

고구려 고분 석실은 크게 3종으로 구분되고 있다. 1종은 가로터널식 석실묘(고구려 고유 분묘형식)이며, 2종은 사각형 절상식(윗부분이 잘린 형식) 석실 또는 궁륭식 석실이고, 3종 4방(四方) 평행고임 우중식(隅重式, 구석기 중첩됨) 석실 등이다.

고구려 고분은 그 주어진 환경의 토질에 따라서 석총을 만들거나 또는 토분을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동가강 유역, 환인(화인)등 일대는 토분이 대부분이며, 유수림자(木兪 樹林子) 일대는 석총이 많다. 북한의 위원, 초산지역에는 작은 석총이 많고, 고산지 부근에는 토분이 많다.

일본인 제등충(齊藤忠)이 1943년 발표한 상술한 9기 외에 통구 12호와 오회분 5호가 추가돼 1949년 이전까지 11기의 벽화고분이 알려졌다. 1949년 이후 중국 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9기로 마전구 1호, 호회분 4호, 산성하 322, 983호, 만보정 1368호, 하해방 31호, 장천1·2호, 우산하 4호 등이다. 현재 중국 동북 지역 벽화고분은 모두 20기다.

고구려 고분은 요녕 한인과 길립 집안 두 곳에 집중돼 있다. 환인 경내 혼강(渾江) 양안 고구려 무덤 조사는 1956~1959년 사이에 실시돼 모두 750기가 확인되고 그 중에서 44기가 발굴됐다. 집안 경내의 고구려 무덤은 노령산(老嶺山)의 영전(嶺前)과 영후(嶺后)에 분포됐다. 1962년 영전 무덤이 가장 밀집된 통구를 조사해 하해방, 우산하, 산성하, 만보정, 칠성산과 마선구 등 6개 지구로 나누고, 그곳 무덤의 일련번호는 모두 1만1천300기다. 그 중에 발굴된 무덤은 마선구 1호묘, 우산한 41호묘가 68호묘, 오회분 4호묘, 만보정 78호묘와 983호 등이다. <계속>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