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항공사의 노동자들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중첩돼 있던 노동현실 때문에 항일민족운동의 한 부분으로 전개됐다. 인천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노동자계층이 형성됐고, 이후 산업도시로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이 크게 증가해 노동문제와 노동운동도 함께 생겨났다. 인천은 일본인들의 경제력이 집중됐던 지역이었던 만큼 인천의 노동자들은 빈곤 해결을 위해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일본인과 투쟁을 거듭하게 됐다.

  # 인천의 노동운동야학운동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민족적 차별의 3중고를 감내해야 했다. 초기에는 노동자들의 자각과 결속력이 미약했지만, 3·1운동의 영향으로 각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해지는 192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서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조직됐는데, 인천에도 1920년 6월 29일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창립되면서 인천 노동운동의 발전을 촉진했다.
1920년대 초 인천지역에서는 노동야학운동이 왕성했다. 1921년 9월 인천 우각리 청년들이 서명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인천지역 노동자 자제를 위한 노동야학을 개설했고, 같은 해 구조조합에서도 노동자 자녀를 위한 노동야학을 설립했다. 1923년 4월경 인천소성노동회라고 하는 지역노동단체가 창립됐는데, 인천소성노동회와 인천노동총동맹에서도 야학교실을 계속 운영하는 등 여러 조직에서 활발한 노동야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차츰 정미공장을 비롯한 인천시내 여러 노동현장에서 일본인 자본가와 한국인 노동자 간에 노사갈등, 민족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소성노동회는 노사간 중재자로서, 또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서 적극적으로 노사간 분쟁에 개입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일본경찰당국이 소성노동회의 노사간 분쟁 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 시기 노동자파업의 특징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주로 노동시간을 줄이며 임금을 올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생존권적 요구를 내걸고 싸웠다. 노동자들은 공격적인 파업으로 궐기했지만, 파업의 기간을 고려할 때 그렇데 완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들을 투쟁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 정미소 선미여공
# 직업별 노동조합의 결성과 노동운동의 성장

한편, 조선노동공제회의 내분으로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됨에 따라 1922년 인천에서도 인천노동연맹이 결성됐는데, 분립됐던 두 노동조직은 1924년에 이르러서야 조선노농총동맹으로 연합했다. 인천노동연맹은 이전시기의 노동단체들이 친목과 상부부조를 목적으로 한 데 비해 노동조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노동연맹 결성 이후 인천에서도 직업별 노동조합들이 속속 조직돼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11월 인천선미여공조합·하역인부조합·정미직공조합 등이 잇달아 결성된 데 이어, 1925년에는 인천철공조합·인천목공조합이 결성됐으며, 1928년에는 인천시내 양초공장 직공 40여 명이 양랍직공조합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속속 결성된 직업별 노동조합은 노동야학을 설치하고 군중강연회, 담화회 등을 실시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직접 조직·지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천노동총동맹은 결성 이후 적극적으로 노사간 분쟁에 개입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강화했고,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일제 당국은 인천노동총동맹의 노사분쟁 개입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고하는가 하면, 1925년에는 인천노동총동맹의 정기총회를 금지하는 등 탄압을 강화했다.
조선노동총동맹이 1925년 11월 노동동맹과 농민동맹으로 분리하기로 함에 따라 인천노동총동맹도 1926년 4월 인천노동연맹으로 개편됐다. 인천노동연맹에는 마차부조합, 정미직공조합, 신문배달부조합, 철공조합 등이 참여했다. 한편, 1926년 8월에는 인천노동연맹과는 별도로 인천청년노동조합이 조직되는 등 1920년대에는 인천노동연맹을 비롯한 여러 노동단체가 조직돼 노동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 제물포항곡물계량장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의 파업투쟁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주로 노동시간을 줄이며 임금을 올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생존권적 요구를 내걸고 싸웠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파업의 기간이 길어졌고, 대응 방법에 있어서도 더 격렬하게 됐으며,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동단체들의 활동이 적극화됐다.

 # 일제의 탄압과 비합법 노동운동의 전개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대륙 침략과 더불어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노동운동은 적색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됐다. 인천에서는 일제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항해 비합법적인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권평근·김성규·이창식 등이 인천의 합법적 노동조직인 인천노동조합을 적색노조로 전환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으며, 그 뒤에도 부두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신보현·김찬옥 등의 적색노조 사건이 있었다. 또 김형선·정갑용·김만석·백봉흠 등이 인천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공장뉴스』등 출판물을 간행해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하려던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적색노동조합운동은 그 출발부터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수많은 활동가와 노동자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그에 따라 파업투쟁은 점차 폭력투쟁의 양상을 띠어갔으며,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해졌다. 또한 193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가 대륙침략 전쟁과 관련해 노동자들에 대한 경제적 약탈과 정치적 폭압을 강화하면서 노동자들의 동

▲ 역무, 가등정미소
맹파업은 더욱 고양됐다.

노동법이 없었던 식민지 상황에서 노동자단체에 의한 파업투쟁의 커다란 특성은 교섭단체로서 노동조합의 승인을 둘러싸고 발생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고용주는 노동조건에 대해 노동조합과 협의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종래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가혹한 노동관행에 반발해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노동단체가 실질적인 교섭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양자의 정면충돌은 많은 경우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파업투쟁은 심각해겼다. 그 결과 유혈사태를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권리를 위해 투쟁, 단체협약을 통해 노동3권을 확보해 나갔던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53) “인천 개항장 풍경”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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