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기원 698년~926년 229년간 존속)가 강성할 시기에는 현 중국의 동북 3성(흑룡강성, 길림성과 요녕성)의 전체 면적과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길림성 대부분, 흑룡강성 대부분, 아라스해안 지구와 조선반도의 부분 지역 등 5경(京), 15부(府), 62주(州), 130현(縣) 등으로 조성돼 있었다.

발해는 짧은 역사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룰 정도의 정치, 경제와 문화 등이 발전됐다.

백두산 동북코너는 발해국의 제일도성(敖東城)에서 100리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해발은 1천740m다. 현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석문지 숭산촌 관할지역의 석문촌(席門村)의 남쪽 언덕의 동굴(洞穴)에서 1963년 중국 고고학팀이 동물화석과 함께 사람 이빨 1개를 발견, 이것을 “안도인(安圖人)”이라고 부르며, 연대는 지금부터 2만6천 년, ‘백두산 최초의 주인공’이라고 칭하고 있다.

중국 고대 중원(中原)의 하왕조(夏王朝)시기에 동방인(東方人)들을 ‘대(大)’ 와 ‘궁(弓)’ 2자를 합해 ‘이(夷)’ 라고 칭했다. 즉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강(西羌), 동이(東夷) 등이다.

발해국은 229년 존속하는 동안 수도(王都)를 4차례 옮겼다. 734년 오동성에서 중경현덕부로, 755년 상경용천부로 옮겼으며, 785년 동경용원부로 옮겼고 794년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긴 것이다.

군사상으로 발해국의 적국(敵國)은 당나라(唐朝), 신라(新羅)와 돌궐, 거란 등이 있었다.

상경성의 외곽성(外郭城)은 장방형, 동서평균 길이 4천800m, 남북평균 길이 3천400m, 면적은 16~16.4㎡다.

발해국은 현무암(Basalt)으로 궁전, 대궐문, 랑묘(廊廟), 정각, 관청건물, 절터, 성벽, 저택(邸宅), 방벽, 도로, 교량, 배수구 등을 설치했다.

목단강(牧丹江)에서 5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강 제방 위에서 5곳 이상의 발해 시기의 옛 다리 흔적(古橋址)이 발견됐다. 예로 상관교(上官橋)의 다리 터는 칠돈팔공교(七墩八孔橋)로 길이 169cm이며, 현존 7개의 받침 돌(大型橋墩)은 용암제(현무암제)로, 받침대 사이 거리 17m이고, 모두 돌받침대 위에 나무다리 또는 돌다리를 아치(arch) 형으로 제작했다.

일찍이 동북지역의 오곡은 마(麻), 기장, 피, 맥(麥)과 콩 등이다. 발해의 채소는 아옥, 겨자, 부추, 큰파, 큰마늘, 오이 등이다.

발해국은 중국 당나라와 150차례 왕래, 빈번한 물물교류를 가졌다. 발해국은 또한 일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 발해의 일본방문 34차, 일본의 발해 방문은 13차로 기록됐다. 발해인 일본 방문 시 최소 22인, 최다 359인으로 기록돼 있다.

발해 민족은 기본적으로 속말말갈(粟末靺鞨)과 고구려 족이 융합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두 번째는 예맥족계로서 부여인, 옥저인, 세 번째는 동호족계(東胡族系)로서 실위인(室偉人), 거란 등 극소 중국인(漢人)도 참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자들은 발해는 하나의 다민족국가로 보고 있다. 예로 발해인은 90기의 성씨(姓氏)을 가졌다. 왕(王), 조(趙), 이(李)씨 등은 중국성이고, 고(高), 을(乙)은 고구려성이며, 박(朴), 최(崔), 김(金)씨 성은 신라성이고, 대(大), 총(?), 덕(德) 등은 말갈성으로 보고 있다. 말갈족은 자체의 언어가 있었으며 그것은 알타이어계의 퉁구수만어족(通古斯滿語族)에 속한다.

발해국의 오경(五京) 지역에 불사(佛寺)가 흥성한 것은 고구려 불교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발해국 상경용천부에 절터 9곳이 확인되고, 탑지(塔址) 5곳이 확인됐다. 그 외 대석불(大石佛), 석등, 향로, 사리함, 소형 청동제 불상 등이 있다.

고구려 무덤문화는 발해 왕실 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발해 무덤은 흙무덤(土墳), 돌무덤(石墓), 벽돌무덤(石+專 墳) 등 3종이다.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왕실 귀족과 관리들이 대거 고려(高麗)에 투항했다. 기원 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申德) 등 500인 및 많은 관리들 그리고 민간인 100호가 고려에 항복했다. 같은 해 12월 발해 고급 관리와 1천 가구 등이 고려로 도망갔다.
발해국은 기원 698년~926년 229년 존속했으며, 거란에 의해 멸망했고, 그 기간 중 15대 왕이 존속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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