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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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대
  • 기호일보
  • 승인 200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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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은 교화가 목적입니다.” 인생살이의 신산스런 골을 알기엔 짧은 연륜의 박 검사. 눈빛이 맑은 그의 인상은 신념이 들어있어 당차 보였다. 부정적인 사건 사고로 얼룩진 뉴스 시간에, 인간미 가득한 한 검사를 봤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다.

초라한 입성의 할아버지가 쓰레기를 뒤져 재활용품을 모아서 힘들게 들고 가는 모습을 카메라 앵글이 따라가고 있었다. 잔뜩 주눅 든 노인은 몸도 정신도 피폐해 보이고 말투도 어눌했다. 노인은 전과 8범이라고 한다.

노인은 공사장에서 새시를 떼내 절취하려다가 붙잡혔다. 조사를 담당한 젊은 검사는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여죄를 추궁했다. 취조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인생유전을 알게 된 검사는 할아버지의 과거사를 흘려버리지 않았다. 노인의 기억에 토막토막으로 남아 있던 옛 지명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할아버지의 진술과 일치되는 지역을 찾았다고 한다. 과연 그곳에는 할아버지의 보호자가 살고 있었다.
노인의 인생은 출발부터 고단했다. 가난한 집에 정신지체자로 태어난 탓에 호적조차 가지지 못했다.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이 노인을 떠돌이로 만들었다. 노인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절도를 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덧 전과 8범이라는 어마어마한 훈장을 달게 됐다. 노인이 훔친 물건 값을 다 합쳐 봤자 고작 몇십만 원이나 될까? 값이 얼마이든 남의 것을 탐하는 절도는 단죄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인에게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온전하지 못한 육신으로 노인이 겪어야 했을 힘겨움에 공감을 해 준 젊은 검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검사는 노인을 냉철하게 서류로 처리해 교도소로 보내는 대신에 할아버지의 남은 생에 빛을 주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세상을 이해한다고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때 상대의 입장이 돼 본다고 한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간접적이나마 내 것인 양 해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상대의 입장에 교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말 내가 그가 아닌데, 살아온 환경이 다른데, 온전히 그 사람이 돼 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사회 구조의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다. 은연중에 오만한 우월감에 빠져 자기 통제에 서툴러 낙오된 사람들을 경멸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젊은 엘리트 박 검사는 냉정한 법조문에 훈훈한 사람의 향기를 실어 주었다.
학년 초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소위 잘 나가는 선배가 와서 재학생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들어가는 대학의 법대에 다니는 선배는 재학 중에 고시에 합격해 모교를 빛낸 선배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선배는 교문 위에 걸린 플래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휘날리며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당당하게 떠 있었다. 명석한 두뇌와 유복한 가정을 축복으로 가진 그 선배는 지금까지 줄곧 상위 계층의 당당함에 익숙해져 왔을 것이다. 열패감을 맛본 경험도 없을 것이고, 인생의 굴곡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실패 없이 최단기 성공 코스를 걸어온 스무 살 초입의 나이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강당의 단상에 선 선배는 후배들의 경탄이 부담스럽고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시선에 긴장을 했는지, 명석한 머리를 은연중 내비쳤나 보다. 재학생들에게 인생지표가 될 선배라 완벽하게 조화된 인격을 기대했던 학생들은 작은 흠에도 충격이었다. 솔직한 정서를 숨기지 않는 아이들의 감정 표현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우리 교육 현실을 비판한 글에 ‘머리는 뛰어나지만 남의 고통에 무심한 사람이 세상의 중심에 선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기 힘들어질까’ 걱정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자랑스러운 그 선배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배우는 교육의 본질을 꿰뚫어, 옳고 그름에 대해 명확하지만 사람이 중심인 판결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법조인이 될 것이라 믿어본다. 한 20년 쯤 후에 부박한 삶에도 눈길 주는 우리 사회의 리더로서 영향력 있는 여성 법조인으로 정말 모교의 자랑스러운 선배로 우뚝 서 주었으면 좋겠다.

타인의 삶에 잣대를 대고 시시비비를 가려주고,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까지 부여받은 판·검사는 법을 해석하고 죄질에 따른 단죄를 내릴 때 법치와 인간 사이에서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법질서와 따뜻한 가슴, 둘 사이에서 절묘한 합의점을 찾아내려고 고뇌하는 법조인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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