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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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지다
  • 기호일보
  • 승인 2009.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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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하다 못해 조금씩 땀이 배어나오는 날씨다. 이상기온이라 한다. 고속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내달리는 토요일 오후. 연둣빛 물기가 나뭇가지를 에워싸듯 아른아른 연한 푸른기가 느껴지는 봄날이다. 고속버스 창가 자리에서 내다보이는 야외 풍경이 나른하게 졸고 있다. 봄볕 샤워에 까무룩 졸음처럼 어지럼증이 온다.
대구에 도착한 시간은 여덟 시가 가까운 밤이다. 택시를 타고 대학 병원으로 달렸다. 결혼해 떠나온 도시는 조금씩 낯설어져갔다. 남겨놓은 기억은 세월에 풍화되어 선뜻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다. 경보하듯 바쁘게 팽창해 간 도시는 나를 낯선 이방인으로 만든다.
대학 병원은 내가 7년을 살았던 동네에 있다. 친정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가에 엄마가 누워 계신다. 폭삭 늙어 보인다. 눈가가 짓무르고 버석한 얼굴에 흰 머리가 달라붙어 초라한 노인네가 되었다. 마음이 아프다. 하루 휴가를 낸 간병인 대신 노곤한 봄밤을 모녀는 오래도록 살을 맞댔다.

허리를 움직일 수 없는 엄마는 처연하게 자존심을 내보인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오물을 닦아냈다. 정갈한 엄마의 가슴이 덧없이 뭉개진다. 여고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청춘예찬」 수필을 보고 나도 배웠는데 하며 갑자기 말이 많아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하, 우리 엄마에게도 청춘이 있었지. 이제 나도 그 즈음의 엄마 나이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로 붙박이 된 줄만 알았지 봄날 한 시절이 있었다고, 푸른 녹이 나도록 묻어 둔 엄마의 청춘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엄마와 나는 외모가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젊어서는 엄마랑 어디가 닮아?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었다. 세상이 뭔지 알듯해지는 나이가 되고 주름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자 내 모습 속에서 엄마를 발견한다. 거울이나 유리창에 비친 외양이 엄마의 얼굴이라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모습도 분위기도 영락없이 엄마다. 엄마만큼만 살아야지, 엄마처럼은 안 살아야지. 내 삶에서 가장 가깝게 비교대상이었던 엄마는 온전히 엄마 판박이가 되어버린 딸에게 너를 챙기면서 살아라, 하신다. 돌아보면 꿈같고 찰나같이 짧았다고.
늙은 어머니는 나이 든 딸이 곁에 와 있어 들떠 있다. 이야기가 끊어지면 너 자니? 묻고 또 묻는다. 뜨거운 물에 덴 것처럼 가슴이 핫핫해진다. 짧은 봄밤이 사위어 간다. 새벽녘에 까무룩 잠든 엄마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팍팍한 각질이 일어나는 얼굴에서 먼지 삭는 냄새가 난다.

대낮,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대학 교정에 봄이 한창 날아다닌다. 군무를 추는 나비 떼처럼 벚꽃이 날리고 있다. 목련같이 뭉그러져 추한 말년이 아닌,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벚꽃이 좋다. 상큼한 청춘들이 꽃비 사이를 지나간다. 아롱아롱 지는 꽃잎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말로의 노래가 생각난다.

‘언제였던가 꽃 피던 날이
한나절 웃다 고개 들어 보니
눈부신 꽃잎 날려
잠시 빛나다 지네.’

내가 좋아하는 재즈 가수 말로가 소소로운 봄날을 노래한 곡이다. 전주(前奏)의 하모니카 소리가 가슴을 판다. 말로의 강물 같은 음색에 짧은 봄날이 흘러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한나절 웃다 보니 꽃잎 날리며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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