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상태바
치유
소설가
  • 기호일보
  • 승인 2009.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찰진 안개로 새벽의 시계(視界)는 이 삼 미터 앞도 흐릿하다.
전조등을 켠 차들이 한가한 대로를 조심스럽게 서행한다.
가로수에 초록 생기 잃은 잎들이 매달려 웅크리고 있다.

가라앉은 무채색이 무겁다. 
나무의 팔이 피곤해 보인다.

조금씩 기울면서 눕고 싶어 한다.

눈꺼풀이 무겁다.

풀어진 눈동자에 힘을 주어 본다.

부스스 한 얼굴이 차창에 보인다.
푸석해서 지쳐 보인다.

석고상처럼 굳어 생기가 없다.

정돈되지 않아 부하게 일어서는 머리카락이 까칠하게 반사한다.

헤드라이트 불빛은 안개터널을 힘겹게 헤쳐 나가고 있다.
안개는 극세사의 긴 자락을 사방에 풀어놓고 여유를 부린다.

한번 밀어내 봐 쉽게 밀리지 않을 걸, 배짱이 두둑하다.

뒤로 뒤로 가로등 불빛이 뒷걸음으로 걷고 있다.

공항의 유도등처럼 길 안내를 해 주고 있다.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이 풀어져 흔들린다.

여자의 마음도 풀어져 흔들린다.

경험 많은 낡은 차는 여자의 화석을 끌어안고 마냥 느리다.

하구에 다다른 강물처럼 서두르지 않는다.

하늘에 서서히 붉은 빛이 퍼진다.

장엄미사의 울림을 눈으로 보여준다.

감정 기복이 심한 밤을 보내면 여지없이 새벽안개도 심하다.

허한 속이 돌출하여 충돌하다 뜨거워지면
밤사이 내려와 지표면을 덮는다.
거둘 것 없어 조바심 난 가슴이
안녕하지 못한 그래서 아직 익지 못한 가을밤을 질기게 밀어내고
미명의 새벽에 눈 떠지면
에워싼 안개가 서늘하고 눅지다.

이른 아침이 싸아하게 목젖에 감긴다.

안개는 세상의 트렌드처럼 여자를 젖게 만든다.

안개속의 침향은 아리고 쌉싸래하다.

얼굴을 묻고 가슴의 공명에 귀를 기울인다.

불온한 안개가 사박사박 여자를 유혹한다.

여자는 성긴 그물을 걷어 올린다.

촘촘해서 허한 안개는 유영하듯 그물코를 통과한다.
우묵한 하늘로 몸을 들어올린다.

흐린 햇살이 퍼진다.

여자의 눅눅한 가슴에도 온기가 전해진다.

여자는 도심을 벗어나 저수지 옆의 소롯길에 차를 세운다.

힘 좋은 잉어가 튀어 오른다.

고요한 수면이 순식간에 생동감으로 싱싱하다.

젖은 풀잎이 발에 감긴다.
여자는 물길을 밀어내듯 안개를 휘저으며 물가에 선다.

저수지는 뜸붕! 뜸붕! 바닥에서 끌어올린 숨을 내 뱉는다.

여자는 흔들리지 않을 미션을 시작한다.

가을 안개에 씨앗이 여물어 가고 있다.

결핍뿐인 지난 계절이 문득 아름다워 보인다.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그냥 잠시 떠나고 싶을 뿐이야.
그러면 안녕,
여자는 가을 안개를 보낸다.

여행을 하고 싶다. 오지 어느 산간에서 마주한 흰색으로 자지러지는 메밀꽃을 보고 싶다.

척박한 토양에서 핏물이 베인 꽃대를 올려 나긋하면서도 안쓰러운 자태로 헛헛함을 다스리는 메밀꽃. 소박함이 아름다워 도시에서 마음 다친 그녀도 또 다른 그들도 사근사근 목소리를 낮추게 하는 힘. 메밀꽃은 천천히 여유로운 산책을 유도한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안도감을 배우는 곳. 서풍이 불어도 좋고 농가 한 채가 고요한 정물로 있다면 더 좋을 곳.
도시 거주자는 가끔 진지한 감상이 필요하다. 까칠한 비판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복원력을 얻어 그녀도 그들도 그럭저럭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돌아올 도시는 조급하게 성과를 기다릴 테지.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