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내면을 향해 내려오는 시간이다. 스며들고 깊어지는 계절이다. 사위어 가는 것이 안쓰러워 모성애로 보듬고 싶어진다. 생명 가진 것들의 유한성, 애잔하다. 어느 시인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빈 곳이 많아지면 가을이 온 것이고 그 빈 곳은 가을의 거처다. 성글어진 가슴이 외로운 가을은 우묵한 눈을 하고 우리 곁을 타박타박 지나간다고 표현했다. 바람 한 줄기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마음이 가을 속을 방황한다. 이때쯤이면, 먹먹하게 젖은 가슴을 불러내 길 함께 동행해 줄 가을 레시피가 그립다.
가을은 긴 시간이 쌓여 만들어 낸 숙성의 계절이기도 하다. 세월의 이끼가 향으로 무르익는 절정의 시간대이다. 살아온 세월의 여유와 인내의 미덕이 있는 계절, 멜랑콜리한 감성과 인고의 깊이가 느껴지는 계절. 이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빚어낸 가을의 음색도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지인의 출판 기념회가 있던 토요일 밤에 우연히 색소폰 선율을 듣게 됐다. 발길이 자연적으로 그곳을 향해 갔다. 색소폰 소리는 어둠이 내린 시청 앞 광장 쪽에서 들려왔다. 중앙에 무대가 없어 연주자를 눈으로 찾았다. 연주자는 객석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담소하거나, 거닐거나, 혹은 화단가에 앉아 자유롭게 감상하고 있는 청중들과 한데 어울려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조도 낮은 둥근 조명이 달빛처럼 연주자를 비추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몽환적이었다. 나는 편안한 자세로 나무 등걸에 기대어 서서 색소폰 선율 속으로 빠져들었다. 밤하늘로 퍼져나가는 알토 색소폰의 음색이 가슴을 파고든다.
색소폰 소리는 가을과 참 잘 어울린다. 늦가을의 애잔함 같은 여운과 삶을 견뎌낸 관조의 음색이 색소폰 소리 속에 녹아 있다. 가슴 속 깊은 자락마다 채워 놓았던 통통 튀는 봄의 생기도, 격렬한 열정의 여름도, 잘 숙성시켜 세월이 지나야 진가를 발휘하는 와인의 맛처럼 깊고 관능적인 음색이 색소폰 소리다.
10년 전, 이맘때쯤이었나? 호숫가 나뭇잎들의 흔들림과 호수의 물빛이 석양에 비쳐 붉게 반짝이며 비늘 같은 물결을 만들어 주었던 한적한 그 가을날. 춘천 호반의 커피숍에서 케니 지의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가을의 정취에 푹 빠져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서정적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 케니 지의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곡은 가을 여행길이라 감성이 예민해진 내 가슴을 감미로운 파장으로 유혹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케니 지의 음반을 사서 가을과 겨울이 다 가도록 참 많이도 들었었다. 더 모멘트(The Moment), 러빙 유(Loving you), 고잉 홈(Going Home) 같은 케니 지 연주곡들은 생각만으로도 이내 환청처럼 흐른다. 한 세월이 더 지난 지금은 클래식과 잘 어울리고 힘이 느껴지는 알토 색소폰과 정통 재즈에 어울리는 깊고 강한 저음의 테너 색소폰 소리가 좋다.
색소폰 연주자는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나이가 돼야 색소폰이 가진 음색을 제대로 살려 낼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연주자의 인생 골골이 패인 주름이 녹아들어야 그 깊은 매력의 음색을 끌어낼 수 있는 악기라는 생각이 든다. 경쾌하고 가벼운 흉식 호흡이 아닌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는 복식 호흡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색소폰을 배우는 중년의 남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아마도 깊은 울림이 주는 색소폰의 음색에 매혹돼서 일 것이다.

아직은 가을의 초입이라 한낮엔 따가운 햇살이 부담스럽지만 밤은 서늘하고 차분하다. 오늘밤, 우연히 듣게 된 색소폰 야외 공연은 정기 연주회였다. 광장에는 바람이 이리저리 불고,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엔 도시의 불빛들이 조명처럼 스쳐가고, 색소폰 연주곡은 내 가슴에 아련한 슬픔을 주었다.
다음 연주회가 열리는 깊어진 가을밤에 나는 색소폰 연주를 듣기 위해 만추의 밤을 비워 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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