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경기 하남지역에서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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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경기 하남지역에서의 독립운동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기호일보
  • 승인 200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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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은 광주의 동부면과 서부면 그리고 중부면의 일부였으며 생활과 문화, 지역정서 등이 대체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남지역의 선조들은 일제의 수탈에 대항해 적극적인 항쟁에 나서 의병항쟁, 만세운동, 신간회 활동, 수리조합 활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졌고, 오늘날 발전 기틀이 그때 선조들의 피흘려 투쟁한 결과로 이룩된 것이라 안할 수 없다.

   # 하남지역 곳곳에서 떨친 의병들의 활약

한강 나루터를 끼고 있는 하남지역은 수많은 의병들이 활동했던 곳으로, 광주의 심진원 의병 부대는 강제로 단발령을 집행하던 광주군수 박기인을 처단하고 남한산성을 점거했으며, 이천에서 김하락, 구연영 등이 일으킨 의병부대와 합류해 1천600여 명의 부대가 구성돼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했던 역사가 전해온다.

의병 항쟁의 실제 사례를 들자면, 1905년 5월 구만서(具萬書)는 의병 40여 명을 모아 양평에서 일진회원 8인을 처단했고, 1908년 9월에는 양주에서 김병길 의병장이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현재의 하남 일대에 와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고, 9월 19일에는 10여 명의 의병이 상산곡에서 활동한 기록이 전한다. 또한 미사리, 구산, 둔지, 황산, 망월포 등에서는 1908년 11월 이강년 의병부대원 300여 명이 숲 속에 잠복하면서 나루터 주변에서 활동하는 한편, 동대문 부근까지도 진출했다. 이들 중 김준식 등 60여 명은 북한산맥을 넘어 서대문 감옥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계획이 누설된 것인지 실제 습격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초이동에서는 김성태가 권총을 휴대하고 ‘의병중군의 사자’라고 자칭하면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됐는데, 그는 이근구(李根求) 의병부대 소속으로 망월리에 400여 명이 잠복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인접한 고덕동 지역에서는 의병 1명이 일본 헌병에 총살당했고, 구천면장 박영조가 세금을 징수하러 다니던 중 30년식 총을 휴대한 의병 2명에게 피랍돼 살해당하고 수금한 세금을 모두 빼앗기는 사건도 1909년 4월 발생했다. 이들은 양주, 광주, 용인 일대에서 활약한 이익삼의 부대원들이었다. 그 외에도 김춘호 의병장, 김광희·광준 형제가 지휘하는 의병 800명, 유학근·안상근 의병 500명, 성남의 윤치장 의병장이 미아리에서 체포된 후 지휘권을 넘겨받은 이춘삼 의병장 등의 활약은 좁은 지면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화가 전해온다.

  # 1919년 천지를 진동한 “대한독립 만세”

1919년 3월은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삼천리 방방곡곡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다. 광주에서는 3월 21일부터 31일 사이에 11회에 걸쳐 7천600명이 참가했으며, 4월 1일부터 15일 사이에 한 차례의 시위가 있었는데 400여 명이 참가했다. 하남지역에서는 3월 26일 교산리 출신 이대헌(李大憲, 1883~1944), 이영헌 등이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다음 날 새벽 2시에도 수십 명이 뒷산인 객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1시간 동안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후, 새벽 3시경 하산해 동경주에 있던 면사무소로 행진했고, 다시 오전 11시경부터 약 3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망월리 구장 김교영(金敎永)도 3월 27일 아침 김용문을 통해 사람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동부면의 만세시위는 천현리의 기독교인이 참가함으로써 500여 명이 넘는 대규모로 확대됐고, 이때 천현리 주민 14명이 검거됐다.
감일리의 구희서(具羲書)는 3월 27일 주민 40여 명을 모아 서부면사무소와 구천면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일본 헌병의 무력 진압으로 2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같은 날 산성리 주민 200여 명도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남한산성에 봉화가 오르기도 했다. 만세시위에서 검거된 14명 가운데 이대헌, 김교영, 김홍렬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각각 징역 2년, 징역 1년 6월, 징역 1년씩의 옥고를 치렀으며, 구희서는 징역 8개월을 치렀다. 특히, 이대헌과 김교영은 현직 구장이었기에 더 무겁게 형량이 정해졌다. 이대헌은 신간회가 설립되자 광주지역 신간회 간사로 활동했다. 이대헌은 1990년에, 김교영은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교영(1857~1923)은 당시 62세로서 그의 조부 김만집은 형 김우집(성우,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 한 분), 아우 김문집과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3형제가 순교했고, 1866년(병인박해)에는 숙부 김차희, 당숙 김성희, 김경희 등도 순교했다. 김교영의 조카 김정운, 조카사위 권명규 등도 함께 왜병에 체포됐다. 왜병은 이들을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을 하는가 하면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끼고 비트는 등 1주일간 심한 고문을 한 후 주모자인 김교영은 서울로 이송하고, 김정운과 권명규는 곤장(태형) 60대씩을 때리고 방면했다. 김교영은 옥중생활에서 피부병(속칭 콩옴)을 얻어 출옥 후 3년간 앓다가 1923년 4월 25일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하남의 만세시위는 천주교인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그 당시 천주교 중앙본부가 만세시위 참여를 적극 말리던 상황과는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 하남지역의 신간회 활동

1927년 2월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을 강령으로 내걸고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가 조직됐는데, 발기인 중 유억겸은 하남 출신이다. 그는 개화사상가 유길준의 차남으로서 해방 후 연희대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내고 1946년 과도정부의 문교부장(현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취임했다. 1934년 미국에서 개최된 범태평양 회의에 김활란 등과 함께 참석해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했고, 1937년에는 이승만의 국내 조직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자옥, 변영로 등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사후에 조병옥, 구자옥, 윤보선, 장택상 등 30여 명의 친구들이 동부초등학교에 ‘유억겸기념관’을 건립했는데,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헐리고, 지금은 기념비만 남아 있다.

신간회는 창립 이후 4년여 동안 우리 민족의 반일 역량을 결집, 실업·교육·노동·농민·언론·종교·여자·청년·형평·학생·사상 등의 부문별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열렬한 민족적 지지 속에 1930년에는 140여 개의 지회와 3만9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일본에까지 지회를 설립해 활동했다. 특히, 광주지역은 광주지회와 광흥지회 2개가 설립돼 더욱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광주지회는 한순회, 한백봉, 한백호, 이대헌, 유인목, 박기환, 한용희 등이 1927년부터 3년간 활동했는데, 처음 회장은 한순회, 부회장은 석혜환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만세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한순회는 천도교 광주교구장으로 전국순회 강연회를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했고 자금을 모아 상해에 보내기도 했다. 부회장 석혜환은 원산총파업에 격문을 발송한 혐의로 1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는 등 지역적 한계를 넘어 반일운동에 종사했다.

  # 두드러진 농민운동 광주수리조합

하남지역의 농민운동의 여러 사례 중 특히 ‘광주수리조합’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광주수리조합의 경우, 동부면·구천면 일대 한강변의 땅을 대상으로 1927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관개시설 설치인가를 받았지만 공사를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방규환이 관개시설 설치인가를 도모하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600여 호의 이재민이 생기자 본격적으로 관개시설 건립이 문제시 됐던 곳이다. 1927년 7월 26일 동부면사무소에서는 광주수리조합 제1회 평의원 회의가 소집됐다. 그런데 이 회의는 광주군민의 일제 식민지배기구에 대한 저항과 자주의식을 대변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감시를 용이하게 하려고 ‘조선토지개량회사’에 위임할 방침을 세우고 있었는데, 평의원을 중심으로 한 참석 지주 및 농

들은 “우리의 사업인 만큼 우리가 직영함이 본 사업의 목적”이라고 지적하며, 광주군의 일본인 내무부장과 농무과장의 계획을 제지했다. 공기는 점차 긴장해 평의원 대 당국자 간에 반대와 권고로 안색을 붉히는 장면이 연출됐다. 급기야 지주 50여 명이 ‘본 조합 설립의 정신은 근년 수재민 구제책에 전혀 정신이 있는 것이므로 당국의 방침을 거부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국면으로 진전됐다. 이 문제는 1929년 말까지도 해결되지 않았고, 조선일보 송파지국 유인목 기자의 특별취재가 될 만큼 사회의 이목과 관심을 끌었다. 2년여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농민들은 단합해 식민지배기관에 맞섰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하산곡리에서 50여 명의 농민이 ‘금단농우회’를 창립해 농민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는 신간회 지회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지방에 있어 항일 한인주의자 중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은 거의 이미 (신간회에) 가입했다. 또 집회나 회원권유, 시의(時宜) 언동을 종합할 때 운동의 최종 목표는 한국의 독립에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1934, p.50)

1931년 상반기 신간회 중앙 및 각 지회가 해소를 선언하기 시작하면서 광주지회의 활동도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후로는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산성리에 근거를 두고 ‘남한산 노동공조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33년에 ‘광주공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1934년 12월 ‘광주공산당협의회’로 조직을 개편했다. 여기에는 석혜환, 구본흥, 구자홍, 구창서, 이경재 등이 참여했는데, 1936년 1월에 이들이 ‘비밀결사조직’ 혐의로 체포됨으로써 와해되고 만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7편에서는 ‘하남지역의 전통 민속놀이’에 대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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