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와서 가장 좋았던 거요, 엄마 집에 와서 같이 지낸 거요.”
“왜지? 관광도 하고 청와대에서 대통령도 만나고 기억나는 일이 많을 텐데.”
“아니요. 나는 엄마네 집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
아키코는 딸애가 가입한 청소년단체에서 한일청소년 교류를 가지면서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 일본 여대생이다. 큰애인 아들과 비슷한 연배라 엄마라고 부르라 했더니 아이는 별 거부감 없이 엄마라 한다. 우리 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담한 체구에 동글동글한 얼굴이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귀여웠다. 붙임성도 있고 예의도 바른 아가씨인데 어딘가에 외로움을 감춰 놓은 것처럼 눈빛이 쓸쓸해 안쓰러워 보였다.

일본 음식으로 하나? 한식으로 하나? 아니면 퓨전으로 하나? 고민하다가 외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불고기와 삼계탕을 주 메뉴로 하고 그 외는 퓨전요리를 만들었다. 아키코는 무엇이나 맛있다며 잘 먹었고 재료며 만드는 방법을 물어 보고 메모도 했다. 우리 애들과 남편은 학교와 직장으로 가고 둘만 남은 집에서 아키코가 청포묵 볶음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부드럽고 고소해 일본에 가면 친구들을 초대해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한다. 부엌에서 둘이 청포묵을 썰고 쇠고기 양념을 하고 미나리를 다듬고 김을 구워 잘라 놓고 참기름과 깨도 준비하고 재미있게 만들었다.
일어를 못하는 나와 한국어를 모르는 아키코는 바디 랭귀지에 서툰 영어를 섞어 대화를 했다. 몸으로 부딪치면 다 통하게 되나 보다. 묵이 투명해질 때까지 볶으란 말이 떠오르지 않아 체인지 컬러라고 했더니 오케이 싸인을 한다. 둘이 쳐다보고 한참을 웃었다. 조리 과정이 단순해 자신있다며 만들어 보고 뒷이야기를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아키코가 소중한 사람이라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스키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딸 같은 아키코가 염려돼 혹시 애인이냐고 물었다. 워낙 성에 개방적인 일본이라 원조 교제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정서인 줄 알지만 딸 같은 아키코가 안타까워 재차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냐고. 결혼 상대자냐고. 아키코는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사람으로 가질 수 없어요. 가정이 있어요. 저 혼자 짝사랑하는 거란다. 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람 어디가 좋으냐고 했더니 자상하고 포근하게 감싸준다고 한다. 그래서 기대고 싶고 함께 살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단다. 지금 전공은 경영학이지만 사진 속 남자 가까이 있고 싶어서 그의 직업인 스키 강사가 장래 희망이라고 한다. 이를 어쩌나 철없는 아가씨야. 외롭다는 아키코를 안아 주고 다독거려 주었다.
아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엄마는 교토에, 오빠는 오사카에, 자기는 시모노세키에 각각 떨어져 산다며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아이도 최소한 4명을 낳을 거라며 항상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정을 만들고 싶단다. 결혼한다고 행복해지고 외롭지 않고 고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잔소리를 좀 했다. 급하게 서두르는 결혼은 실패하기 십상이니 신중히 생각해 결정하라고. 또 쓸데없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우리 집에 와서 화목한 가정 분위기를 보니 빨리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단다. 엄마처럼 에프런 두르고 가족들 위해 맛있는 음식 만들고 저녁에 들어오는 가족들 다정하게 웃으며 맞아 주고 싶단다. 우리 집이라고 항상 웃고만 사는 게 아니다. 격렬한 충돌도 있었고 헤어질 각오도 했었다. 그러면서 맞춰 온 것이다. 지금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괜히 젊은 아가씨에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집어넣어 준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했다.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많이 참고 이해하고 품어주어야 성공한 결혼이 된다며 교장선생님 훈화 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아키코의 여린 가슴이 상처받을까봐 걱정스러운 마음에서였다. 아키코에게 내가 아끼는 나비 귀걸이를 선물로 줬다. 나비처럼 비상하면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항상 네 뒤에서 지원군으로 지켜보고 있는 엄마를 잊지 말라고 했다. 아키코의 눈에 글썽이던 눈물이 오래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일본으로 떠나는 날 청포묵을 두 장 사서 손에 들려주고 배운 대로 만들어서 친구들과 맛있게 먹고 꼭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를 했다. 앨빈 토플러가 쓴 ‘부의 미래’에 미국의 여성들은 75%가 결혼은 해야 한다는 반응인데 놀랍게도 일본 젊은 여성들은 88%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조사보고서가 실려 있다. 결혼에 대한 전통 가치가 다 무너진 일본에서 간절히 가정 갖기를 소원하는 아키코의 어린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찾아오기를 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