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커서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각자의 생활 사이클이 달라져 가족 모두가 식탁에 들러 앉아 여유 있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곤 휴일밖에 없다. 한 주를 자기 시간에 쫓겨 바쁘게 보낸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휴일 점심이면 나는 비빔밥으로 점심상 차리기를 즐긴다. 가끔은 가스 불에 달군 옥돌 그릇에 여러 가지 나물과 날치 알을 고명으로 색 맞추어 지글지글 소리까지 맛있게 담아내기도 하지만 쉬운 대로 냉장고에 먹다 남은 반찬 털어 넣고 김과 김치를 송송 썰어서 고추장과 참기름 넣고 큰 양푼에 비벼 낸다. 이럴 땐 점심을 먹으면서 서로의 속내를 얘기하기도 하고 세상의 이슈에 토를 달기도 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는다.

비빔밥은 우리 음식이다. 그런 우리만의 고유한 음식이 지금은 외국에서도 인기를 얻어가고 있단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조화가 잘된 고른 영양과 채식 위주의 식단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비행기 기내식으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우리의 귀한 음식 다 젖혀 놓고 이것저것 재료에 따라 맛의 변화를 줄 수 있고 비벼 먹으면 독특한 맛이 생겨나는 비빔밥이 퓨전 음식으로 발달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아가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내가 이웃을 초대하거나 친구들이 찾아오면 비빔밥으로 대접을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선은 한 상 가득 힘들게 차리지 않아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음식 준비가 부담스럽지 않다. 그때그때 집에 있는 여러 가지 야채를 무치고 볶아서 큰 뷔페접시에 돌려 담아 놓고 늘 준비돼 있는 김치와 고추장과 참기름만 내오면 끝이다. 지난번에 맛나게 먹었던 비빔밥 재료가 오늘은 준비가 안 돼 빠져도 다른 재료가 또 그 자리를 채우면서 제 역할을 근사하게 해 준다. 큰 그릇에 각자 식성대로 이것저것 밥 위에 올리고 쓱쓱 비비면 이야기꽃 피우면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한 숟가락 푹 뜨면 입안에 군침이 돌고 잘남도 시샘도 벗어 던지고 비빔밥 한 그릇에 흉허물 없이 마음을 열게 된다.

오늘,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함께 비빔밥으로 점심을 했다. 자리를 함께 한 친구들은 살아가는 이야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양념으로 넣고 갖가지 사건과 애환을 풀어 이미 이야기들로 한바탕 비비고 난 뒤였다. 비빔밥에 들어간 여러 가지 재료가 고유한 자기 맛을 가지고 있듯이 오늘 모인 우리 친구들 성격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수수하지만 속 깊어 나물 속에 녹아 들어가 감칠맛 내주는 오래 묵은 장맛 같은 영숙이, 언제 봐도 상큼한 생채 버무림 같은 연희, 아삭아삭 씹히는 살짝 익힌 콩나물 무침 같은 경희, 은근한 맛을 내 주는 쇠고기 볶음 같은 순자, 알싸하게 매운 입담이 매력인 맛있게 매운 고추장 같은 상미, 튀는 성격으로 친구들 가슴에 상처 주기 일상이던 민주. 그 민주는 세월 앞에 푹 삶아지고 우려져 독소를 빼 낸 맛난 고사리나물이 됐고, 세상 뜨신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 뒷바라지에 청춘을 바친 미자는 두루 잘 비벼지게 마지막에 넣는 참기름 같은 고소한 맛을 지녔다. 친구들은 이렇게 각자 개성이 강한데도 같이 어우러지면 서로 뜻이 통하고 마음이 편해진다. 날카로워 흠이 될 성격도 같이 비벼지면 맛깔스런 우정이 생겨난다.
그래서일까. 우리네 사는 모습이 어찌 보면 비빔밥 같기도 하다. 내가 지닌 맛과 네가 지닌 맛이 어우러져 모난 곳 있으면 메워 주고 힘들면 서로에게 등 기대어 쉬기도 하면서 품어 주고 풀어내며 한세상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리라. 우리만큼 우리라는 말을 다양하게 쓰는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는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우리로 뭉뚱그려 부른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우러짐의 참 맛 그 맛의 대표 음식 비빔밥처럼, 새해부터는 비방이나 대립이 아닌 어우러짐의 지혜로 모든 이들이 세상과 동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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