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시작되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삼목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첫 배를 타기 위해서다. 청보라빛 어둠이 옅어져가는 인천대교를 달리면서 사람의 능력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바다를 가로지른 거대한 구조물이 새삼 경이로웠다. 어제 밤까지 몰아치던 바람과 시야를 온통 누렇게 만들었던 답답한 황사장막은 물러갔지만 바람의 기세는 녹록치 않아 첫 배가 출항할 수 있을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30여 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날이 밝았고 서해에서 일출을 보는 특별함도 누렸다.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첫 배를 타고 장봉도로 출발했다. 추위에 떤 몸을 선실에서 녹이고 배를 따라 선행하는 갈매기의 눈이 예뻐 뱃전에 나와 한참을 보냈다.
도착한 혜림원에서 아침을 먹고 일부 젊은층과 학생들은 혜림원 봄맞이 대청소를 하기 위해 남고 우리 일행은 오늘 봉사 장소인 마을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열심히 일한 한 주의 끝 일요일을 누군가를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여유가 잔잔한 파동으로 퍼져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의료봉사는 여러 번의 경험이 쌓여서 전문 의료진이 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 보조 역할자로 꽤 쓸 만하니 동업하자는 우스갯소리도 하면서 환자 맞을 준비를 했다.

동선에 맞게 각자의 자리배치를 하고 진료와 처치, 약 조제, 환자 안내 등 자신이 맡은 파트에 몰입했다. 농어촌 어디나 공통된 현상이지만 이곳도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등 굽고 주름진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고된 노동으로 정형외과 환자가 많았다. 뼈마디가 닳도록 열심히 생을 사신 어르신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으면, 그분들의 삶에 경청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회관 벽에 결려있는 액자에 가슴 시큰해지는 글이 있었다.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게 하게 사는 것이 평안하오.
옛 일랑 모두 잊고 잘난 체랑 마소. 우리 시대는 지나갔으니.
돈돈돈 하며 욕심 부리지 마소.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
남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 나게 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많이 뿌리소.
그렇지만 정말로 돈은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붙잡으소.
옛 친구 만나거든 술도 한 잔 사고, 손자 용돈도 한 푼 줄 수 있어야
얼굴이라도 가끔 볼 수 있다오.’

늙어서 뒷방 늙은이로 존재감이 없어지는 어르신이 많아지는 게 시정현실이다. 급속한 산업화 시대를 숨가쁘게 살아 오늘의 풍요를 만드신 주역인데 액자 속 글처럼 노인분들의 노후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지를 못한다.
이 섬에서 유명하신 욕쟁이 할머니가 오셨다. 굴 까고 조개 줍고 어깨와 무릎관절이 다나가도록 열심히 사셨을 할머니는 거친 입담으로 신산한 삶을 버티셨다. 인정 많고 따뜻한 마음이 말 속에 베여있어 욕을 먹어도 그 말이 정겹게 들린다. 어느 지방이나 욕쟁이 할머니는 꼭 있다. 그분들의 치열했을 삶이 무직하게 와 닿는다.

낮부터 기온이 많이 올라가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지만 어김없이 봄은 시작되고 있었다. 수선화는 꽃대를 올리고 벚나무도 진달래도 꽃봉오리를 야물게 부풀리는 중이다. 꽃대궐 차릴 날이 멀지 않다. 어르신들의 봄도 화사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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