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의 관계맺음에는 실질적인 목적과 마음으로의 연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둘이 딱 떨어지는 이분법보다는 서로 연결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 일로 인한 관계이든, 사교로 인한 관계이든, 필연적인 혈육관계이든 반드시 불편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의 정서적 교감에 장애가 생겨 소통에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있는 자리가 편하지 못하다.

이런저런 연유로 모임을 함께 하는 이가 있다. 상냥한 목소리와 지극한 예의로 사람들을 대한다. 말도 조곤조곤 조리가 있다. 자기 몫도 확실하게 챙긴다. 문제는 그이에게 도움이 되거나 나름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한해서다. 만만한 상대에게는 무례하다. 시샘은 봐 준다 해도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찍은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는 당사자에게 모욕이다. 상처가 남아 쉽게 가시지 않는다.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평이 나도는 것을 본인은 인지를 못하는지, 무시하는지 그 속은 알 수 없다.
그이와 작은 언쟁이 있었다. 여러 번의 할큄으로 응어리가 쌓였던 터라 그이의 한마디에 확 화가 솟았다. 맞대거리를 했더니 그 묘한 재주의 언변으로 농담도 못 받느냐는 식이다. 분기탱천해서 그이는 팽하고 나가버리고 남은 나는 함께 한 사람들 보기가 민망하고 속도 상했다. 모임 내내 여기저기서 마주쳤지만 그이도 나도 냉랭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참고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이는 독실한 신자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한다고 했다. 진심일 것이란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현실과 욕망 사이의 거리 조절이 그이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자려고 누웠는데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는 이미 내 마음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나는 내 결기를 내려놓는다. 그래도 마음 한 모퉁이에는 여전히 어쭙잖은 결기가 박혀 있다. 그이는 자신을 위한 방어에 열심일 텐데 나만 왜 허허실실이어야 하지. 뽁닥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참 시간이 흐르자 어쩌면 그이가 더 외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다감과 친절이 속보여도 그이는 자신의 방법으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중일 것이다. 특별한 그이의 말투는 진정 마음을 열고픈 신호였다고 정답을 수정했다. 지금 그이가 누리는 위치를 욕심과 악착이라 칭하기는 미진하다. 자기 삶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라고 그이를 존중해 주고 싶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 들면서는 편하고 따뜻한 사람이 좋다.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을 것이고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을 것이다. 좋은 말만 해도 평생 다 못하고 죽는다. 소소한 것에 마음 다치는 일이 없도록 적대를 내려놓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랑하고 싶다.
마음을 다스리는 글들을 모아놓은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당신은 정의로우려는가, 행복하려는가?’ 시시비비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그이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계속 내 속에 있다면 맑은 눈으로 그이를 보기가 힘들 것 같다.

전지적 인품을 가진 절대자에게 엎드려 기도하는 마음은 여리다.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고 싶다. 그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이 밤을 보낼 것이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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