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공개해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강대한 나라의 최고 권좌에 2번이나 앉아 있었던 분이라 죽기 전에 뭘 해보고 싶은지, 아직도 못해본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공감했던 것은 다리 힘이 남아있을 때 마라톤을 완주하고 싶다거나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남아있을 때 등정하고 싶다는 덜 중요한 소망부터 살아생전에 꼭 손주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까지. 슈퍼파워의 미국 대통령이나 우리나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소망의 크기가 별반 다르지 않아 소탈하고 인간적인 목록에 호감이 갔다.
2007년에 개봉됐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버킷 리스트’는 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늙은 두 남자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을 들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뭉클한 장면에다 웃음을 곁들여 오래 가슴에 남는 영화였다. 영화의 후폭풍으로 모임에서 버킷 리스트를 공개하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나도 당연히 버킷 리스트가 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B리스트처럼 덜 중요하고 무게가 가벼운 소원도 있고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A목록도 있다. 삶에서 느끼는 다양한 의미부여는 개인의 몫이라 어느 것이 더 감동인지는 철저히 개인 소관이다. 손쉽게 꼽는 세계여행부터 초막에 누워 청산별곡을 읊는 것까지 남녀와 장유(長幼)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의 소원은 대체로 평화적이다.
살아온 생에 대한 보상으로 한 1년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도 가져보고 싶고, 햇살 고운 대청마루에서 노트북으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싶고, 지구 오지 마을에서 단비 같은 봉사도 하고 싶고, 설레는 로맨스도 꿈꿔 본다. 그러나 결국은 내 아들과 딸이 건강하게 사회에서 자기 몫 하면서 좋은 배우자 만나 할머니 소리 듣는 것이 우선인 걸 보고, 한 여류작가는 시시하다고 어디 가서 소설 쓰는 여자라고 말하지 말랬다. 그래도 살면서 힘이 되는 것은 모성적 본능인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열심히 살고 한계에 도전하며 때로는 무모한 욕심을 갖는 것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족을 위해서다. 그러다 문득, 우울이 오기도 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치유도 가족이다.
성공을 위한 열정으로 과도한 에너지를 쏟았던 과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나를 내려놓는 휴식은 필요하다. 피해의식으로 가시를 키우고 나를 폄하하고 살아온 삶이 억울해지기 시작하면 정신도 몸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위급한 신호다. 화급한 신호를 수신했으면 마음을 점검해 볼 때다. 과부하가 걸린 심신과 다정하게 눈 맞추며 느린 호흡으로 나를 돌아볼 여유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휴가기간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준 휴가다. 장시간 과로할 자동차를 위해 차주는 꼼꼼하게 자동차 점검을 받는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경정비는 충실히 하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는 일에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회의가 온다. 살아 보니 내 삶의 주인공인 나는 주변으로 밀려나 있고 당당하게 주연의 자리를 누리는 그들은 객인데 떠나거나 사라질 그들을 위해 왜 나를 혹사했나 허망해진다.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도 결국은 자신이 행복한 일이다. 거국적 목표도 좋고 때로는 나의 희생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내가 우선인 시간도 필수다. 버킷 리스트 목록에 소박하지만 입맛 돋우는 정갈한 시골밥상처럼 내 가슴이 행복해지는 소원 성취가 리스트에 올라오는 것은 당연하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