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안동을 다녀왔다. 안동은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 문중의 종택 같은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와 관련된 유적이 많아 유교문화의 전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꼿꼿한 기개의 선비정신이 자존심으로 살아있어 독립운동의 시발이 된 곳이고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유공자가 나왔다는 사실이 안동의 유교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주체가 되었다.

        ‘배운 대로 살아라’는 사대부 사명

‘배운 대로 살아라.’ 도덕의 헤게모니를 이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한 말은 없는 것 같다. 안동 답사 동안 역사로 남은 이들을 보며 느낀 점이다. 사회의 상층에 속하는 사대부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패권으로 여겨 정도(正道)의 양심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준 많은 이들이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그 중의 한 분이 이육사 님이시다. 그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이다. 안동은 독립운동의 강성지로 독립유공자 배출이 가장 많은 지역이고 자결 순국자도 가장 많이 나온 지방인데 이런 강직한 저항성은 퇴계학통에 나온 것이라 한다. 퇴계학풍의 정신적 틀인,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다 알고 있듯이 40년 생애에 17번 수감생활을 하신 시인은 대구 형무소에서 받은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지으셨다. 이육사 선생님은 6형제 중 둘째이신데 형제 4분이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집안이다. 강직과 다정이 조화를 이뤄 독립투사로 강성이었던 반면엔 문학적 감수성으로 여린 가슴을 가진 분이시기도 했다.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위었지만 주변 지인이나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로 추억하는 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셨다며 이야기 말미에 목이 메기도 했다. 귀히 여긴 딸에게 백일 날 지어준 이름, 옥비(沃非)를 사랑한다고 했다. 혼자 기름지게 살지 말고 ‘더불어 나누어라’라는 뜻이라 아버지의 염원대로 살려고 노력하다는 말에 가슴이 찡했다.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3살 때 포승줄에 묶여 북경으로 이송되는 아버지를 멀리서 본 것이 전부이고 마지막 기억이라며 아버지를 추모하고 기릴 수 있는 문학관에서 생활하는 지금이 여생의 큰 기쁨이라 한다.

우리는 뉴스에서 지도층 인사의 비리를 자주 보게 된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고 국민을 기만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배운 대로 살면 정도의 삶이다. 교육에서 가르치고 배운 대로 살아 인성의 예의를 갖춘다면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고등학교 때 윤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수업 중에 ‘머리 나쁜 이는 자기 주변 몇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만, 머리 좋고 많이 배운 인간이 나쁜 짓을 하면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받는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함께한 원로 문인의 말처럼 이육사 시인은 일제의 총독정치가 극성을 부리는 암흑 속에서 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충정을 문학에 녹여 보였고, 시와 문학에 역사와 현실을 저며 넣을 줄 안 전인격적인 문학자다. 임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민족독립 투쟁사의 높은 별이며 푸르고 청정한 낙동강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 같은 분이다.

           선비의 길 보여준 이육사 일생

조부는 노비에게 자유를 주고 재산을 분배했고 외조부 집안은 가산(家産)을 군비로 해 최초의 독립의병장을 한 혈통을 이어받았다. 시대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주저 없이 온몸을 던진 임의 전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친다. 바른 선비의 길이 무엇인지 배운 대로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 후대의 우리는 이육사 님의 일생을 보면서 자기반성 하나쯤을 가져야겠다. 특히 사회지도층의 각성을 기대해 본다. 사람의 길, 대동의 길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원이 국회에 전달되어 정말 국익을 위한 정치를 해주기를 그분들께 부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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