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폭우를 동반한 열기가 지나가고,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지면 세상의 사랑은 온화해지고, 순천만의 갈대도 철새를 부를 준비로 서걱거린다. 점점 석양이 깊은 우물처럼 뻘에 내려앉으면 순천만에 겨울이 찾아온다.
마른 공기를 가르며 겨울 진객이 오셨다. 흑두루미가 날아들면 순천만은 광영이라 어수선을 정리하고 조신하게 앉아 벅찬 가슴을 풀어놓는다.
짧은 겨울 해가 시베리아를 에돌아 온 바람에 밀려 갈대밭에 포물선으로 떨어진다. 낙조로 붉어진 뻘에 새들이 내려앉고, 저물어 가는 하늘에도 새떼가 적막을 깨운다. 갈대숲 사이로 난 물길을 탐사하는 배에 올랐다. 가속도 붙은 배가 굴곡진 물길을 거슬러 나아가고 모터의 진동 소리에 갈대숲 철새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배는 울룩불룩 물살을 치고, 부딪히며 흩뿌려진 바닷물이 뱃전을 때린다. 선실에서 나와 쨍하게 선명한 바닷바람을 맞아본다. 보트와 부딪힌 바닷물이 얼굴로 튄다. 짠 바닷물과 손잡은 갯바람이 얼굴을 찔러 따끔거리고 화끈화끈하다.
갯벌에 물이 흘러 수많은 생명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도 사람들은 삶의 줄을 놓지 않는다. 혹한의 겨울, 순천만은 살아있어 꼬막을 캐고 뻘을 헤집어 바구니를 채운다. 뻘은 휴지기도 없이 생명을 만들고 키우고 부정을 정화시킨다. 생에 대한 애착을 조개의 종피처럼 뻘 속에 뿌려 성실히 돌본다. 그래서 자전하는 지구를 돌아 시베리아를 건너 온 겨울 철새는, 이곳에서 먹이를 얻고 힘을 얻어 신성한 에너지를 날개에 저장한다.
순천만의 뻘은 겨울 동안 침묵을 지키며 흘러들어온 나태와 증오와 무절제와 방탕을 침윤시켜 건강한 영혼으로 변화시키고, 무방비로 넘쳐나는 자극적인 소음을 흡입해 소모적 논쟁을 종결시켜 봄을 초대할 준비를 한다. 때때로 침묵과 명상이 통성기도보다 훨씬 더,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내 소리는 너에게 가 닿지 못하고, 무수한 소리들인 잡음에 묻혀 중간에 소멸되고 만다. 이렇게 침묵은 겨울 뻘처럼 생명을 창조하는 자양분으로, 덕성을 수련하는 힘으로 작용해 동적인 에너지가 된다.
내 몸속의 뻘에도 겨울이 온다. 나는 이 겨울 동안 순천만에서 배운 지혜를 빌려와 소통의 부재로 갈등하는 일이 없도록 할 참이다. 진종일 네 생각으로 그리웠던 가슴의 그림자를 불러와 띄엄띄엄 해독해서 서운했던 마음을 풀어주겠다. 너의 진심이 조금 늦게 배달되어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고, 폭죽 터지듯 화려한 반응이 아니라도 기쁘게 받겠다. 가끔은 게으름도 즐길 것이고 콜타르처럼 끈끈하게 눌어붙은 불안도 떼어내 버리겠다.
머릿속을 비워 낸 갈대들이 오롯이 자신만 바라보는 시간을 즐긴다. 갈대밭 길을 산책하는 내 발걸음도 안정을 찾아 갈대밭의 무수한 갈대처럼 수려해진다. 뻘 속에 박힌 뿌리 끝까지 산소를 공급하는 갈대처럼 내 마음 깊은 심연에 신선한 과즙같은 활력을 불어넣어 내 체액을 기쁨으로 채워 겨울을 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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