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갑영/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

 D군!
‘착한 생닭’이라고 들어보았습니까? 닭들의 나라에서는 모르겠지만 닭이면 닭이지, 착한 닭이 어디 있고 나쁜 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대형 마트가 기획한 상품 이름입니다. 대형 마트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경쟁은 당연히 그들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골목상권’을 침해하게 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경쟁이 한층 가열된 것은 한 업체에서 피자를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아 소비자를 유혹하더니, 경쟁업체는 재빠르게 ‘통큰 치킨’으로 대응했고 이어서 또 다른 업체가 ‘위대한 버거’로 반격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또 하나의 업체가 ‘착한 생닭’으로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 것입니다.

착한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냥 닭이 아니라 ‘착한 닭’이라고 이름 붙이니 무엇인가 달리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소비자들의 이런 느낌까지 감안해서 기획한 마케팅이지만 닭의 경우처럼 같은 고기라도 ‘착한 고기’가, 같은 커피라도 ‘착한 커피’가, 같은 기업이라도 ‘착한 기업’이 무언가 다르다고 느껴지는데, 하물며 살면서 ‘착한 자본가’라도 만나는 날이면 어찌 그까짓 ‘착한 닭’에 비기겠습니까!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세상에는 노동자들을 자기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 주는 착한 자본가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D군!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둘 것은 세상에 착한 자본가는 무수히 많을 수 있지만 ‘착한 자본’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장난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자본가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본의 본성입니다. 자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흔히 자본하면 엄청난 액수의 돈이나 기계 또는 건물이나 원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본이 없다면 생산도 할 수 없고, 사람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당연히 자본이 중심인 자본주의는 영원하게 되지요. 하지만 자본은 돈이나 기계 같은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관계, 특히 생산관계입니다. 자본은 나무에 주렁주렁 열리거나 고구마처럼 땅속에서 마구 자라는 게 아닙니다.

자본은 생산되어야 합니다. 자본은 축적이고, 축적된 노동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을 ‘죽은 노동’이라고도 불렀는데 오늘의 자본은 바로 어제 노동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사회나 축적된 노동은 필요하지만, 축적된 노동은 특수한 사회관계에서만 자본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노동과 만나서 새로운 잉여가치 즉, 이윤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축적된 노동은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자본이 이윤을 얻으려면 반드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한다는 차원에서 착한 자본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고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본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편이 이렇기 때문에 ‘착한 자본가는 있어도 착한 자본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착한 자본가라도 자본가로 살아가려면 적절한 이윤을 남겨야 하고, 그러려면 노동자들에게 좀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게 됩니다. 착한 자본가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본가들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착한 자본가조차 이윤을 얻기 위해 애쓰고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가치를 늘리려고 합니다. 어떤 자본가가 특별히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자본가와 경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그래서 자본주의는 죽은 노동인 자본이 살아있는 노동을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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