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활동에서 만난 영미 씨는 지적장애인이지만 나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싫고 좋은 게 분명하고 가슴에 쌓아둔 먼지가 없어 명랑했다. 그녀는 풀꽃처럼 자신에게 충실했고 탓이 없이 당당했다. 부탁도 희로애락도 눈치보지 않고 자기 감정에 충실해 단순하지만 명쾌했다.

주말 나들이 갔던 차량들이 도로를 메워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도로 위에서 오늘 하루를 돌아봤다. 꽃축제가 한창인 곳곳에 참여는 못했지만 또 다른 풀꽃을 만나고 온 하루라 기분 좋은 피곤이다. 색감 고운 봄의 자연처럼 휴일 하루를 같이 보낸 영미 씨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쏟아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매력도 그저 그렇고, 능력도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인 내가 누군가에게 빛이 될 수 있다면 내 삶은 긍정이고 강물처럼 유유자적 여유로워질 것 같다. 삶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장대하고 오묘해 설명으로 완벽히 이해되지도, 이해하지도 못해 우리는 구원자를 찾는다. 그래서 선함을 누릴 수 있는 경험은 어찌 보면 특혜를 받는 시간이다. ‘선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선한 부분은, 보잘 것 없고 이름도 없으며 기억되지도 않는, 친절한 사랑의 행위들이다.’ 어느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영미 씨는 내 손을 꼭 잡고 봄 날 하루가 행복했고, 나는 영미 씨에게 받은 씨앗을 키워 남은 생이 행복할 예정이라 영미 씨가 봉사한 날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한동안 힘든 시간이 있었다. 긴 세월 쌓인 앙금을 털어내지 못한 가슴은 건조한 모래 강이 되어 푸석푸석해졌다. 고도 1만m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지상의 고민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무모함처럼, 긴 시간 긴장으로 고립된 가슴이 내게 딱딱한 갑옷을 입혀 춤을 춰 보라고 강요하는 부당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겉은 수도승처럼 고요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거센 풍랑이 일었다. 그러면 일탈을 꿈꾸기도 하는데 몸이 먼저 반응해 멀미를 했다. 잠깐의 어지러움과 귀울림은 내게 익숙한 일상을 털어내는 반작용인가 보다 생각했고, 복잡한 가슴에 새겨진 균열을 실금이라 여기며 앙증맞은 캐릭터를 보듯이 너그럽게 견디려 했는데, 마음이 불편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사람의 마음 속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 슬프면 물이 새어나오고, 기쁠 땐 물이 넘쳐흐르고, 화가 나면 물이 거꾸로 치솟고, 즐거울 땐 물이 콧노래 소리를 낸다고 한다. 내 마음속 물이 콧노래를 부를 수 있게 살아야겠다. 덜 예민하고 조금만 깔끔 떨면 가능하겠지. 완벽은 신의 역할인데 자격 없는 내 몫이 아니니 내려놓고 실수도 하고 허허실실 허점도 내보이면서 내가 기뻐할 일에 시간을 써야겠다. 시기가 좀 늦기는 했지만 시작이 반이라는데, 새로이 싹을 틔워 풋풋한 생기로 키워 절정을 향해 가는 봄을 좇아가고 싶다.

영미 씨의 봄이 찬란한 것은 둔하면 둔한 대로, 느리면 느린대로 나를 예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서 인 것 같다. 열등 없는 솔직함이 영미 씨의 매력이다. 정작 정상인인 내 마음엔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다. 마음을 꽃물처럼 고운 색으로 물들이게 자극을 준 영미 씨가 고맙다. 서른다섯 살의 영미 씨보다 숱한 봄을 더 살았어도 여태껏 어리석은 내게 그녀가 준 선물을 가슴에 꼭 품고 돌아왔다. 복작거리는 마음을 내려놓은 봄밤이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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