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미얀마 여행을 갔었다. 미얀마는 소승불교 나라로 자신의 수양에 게으름 피우지 않는 불심 깊은 사람들이 사는 불국토이다. 생활은 궁핍해도 자존심 강한 미얀마 사람들의 삶이 결코 부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소득이 높아지면 행복지수도 비례해 높아져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우리 삶이다. 풍요로운 물질에 개인의 삶을 최대한 존중하는 서구사회에 자살자가 더 많은 아이러니가 이를 증명한다. 이곳 한국인들은 가사도우미를 식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 세대 전까지 우리가 흔히 사용하던 호칭이다. 불리는 호칭이야 어떠하든 미얀마인들은 인격적 모욕을 느끼면 당장 일을 그만둔다고 한다. 1인당 GDP가 160달러 정도라 물질적으로는 더 없이 궁색해도 고용주에게 지나친 아부도, 존대도 하지 않는 것이 미얀마인들의 자존심이라 한다. 흔히, 가난한 사람은 남에게 굽힐 일이 많아 기를 펴지 못해 저절로 천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빈자소인’이란 말이 이 나라에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파고다의 나라 미얀마에서도 쉐다곤 파고다는 인상적이었다. 미얀마 최고의 사원이라 웅장한 모습도 압권이었지만 그곳에서 받은 느낌이 특별해서다. 사원은 낮과 밤의 풍경이 사뭇 달랐다. 낮에는 화려한 금박으로 덮인 외양이 강렬한 태양빛에 반사돼 번쩍거리면서 위압적이라면, 밤의 쉐다곤은 엄숙하고 신비로웠다. 여기저기 넓은 사원에 참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심 깊지 않은 나도 부처님에 대한 경외심에 삼가 마음이 두려워지고 또 고요하고 엄숙해졌다.
파고다에 참배할 때는 반드시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맨발로 긴 회랑을 돌아 부처님을 만났다. 꿇어앉아 기도했다. 세상사 욕망이 끝 간 데 없이 어지럽지만 지금만큼은 부처님 발바닥보다 낮게 앉아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선(善)해지면서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이들을 용서하고, 미약한 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귀향해 일상으로 돌아오면 오늘밤 소박하고 착해졌던 이 마음이 먼지같이 날아가 버릴지라도 그 순간만은 고요하고 출렁임 없는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미얀마 사원에서 이색적이었던 광경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부처상의 얼굴에 청수를 부어 씻어 주는 모습이었다. 죄를 씻어 가벼이 하고픈 반성과 자신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불심을 받고자 하는 참배 방법이라고 한다. 전세(前世)에 저지른 악한 일을 불교 용어로 숙악(宿惡)이라 한다. 숙악이 있으면 후세에 반드시 죗값을 치른다고 하는데, 윤회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미얀마 사람들은 대체로 말초적인 자극을 멀리하고 순리대로 선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 속을 나는 스치듯 잠시 동행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들은 무수한 번민을 가라앉히고 나를 돌아보게 한 여정이었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다. 불심 깊은 불자가 아니라도 오늘은 부처님 전에 엎드려 나를 한없이 낮추고만 싶어진다. 나 잘난 사람들 천지인 세상인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로 뉴스에 나오는 사건·사고는 까칠하고 엽기적이다. 배려와 공감이 부족한 우리는 가시나무로 벽을 만들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다. 세상을 밝히는 연등을 가슴에 모셔 마음의 오욕칠정을 바로 볼 수 있게 긴 참선을 하고 싶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중생들이 아름답게 동행할 수 있는 불국토를 만들려고 하셨을 터이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사람들 마음이 자비심으로 고요한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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