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이 나면 혼자서 여행을 다닐 거야, 결심만 열심이고 실행은 멀었다. 매번 사정이 생기고 핑계가 만들어져 쉽지 않다. 적당히 용감해야 되고 적당히 무심해야 되고 적당히 부지런해야 되고 갖추어야 할 덕목(?)이 여러 가지였다. 작은 출발로 시작해 큰 걸음으로 성큼 나설 날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그렇게 몇 번 길을 떠났다. 운주사도 그 중 하나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날, 와불을 보고 가는 중이라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워 있는 부처를 보고 있으면 내가 와불인지 와불이 나인지, 엉뚱한 자리에서 자학만 하고 있는 형상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얼른 돌아서 내려가면 뒤가 켕겨 자꾸 돌아보게 되더라고.
친구와 한 달 전쯤에 같이 운주사를 다녀온지라 또 갔어? 하는 내 말에 그냥…. 말끝을 흐렸다. 별일 아닌 듯 연말이라 모임도 많고 챙길 일도 많아 머리 식힐 겸 잠깐 바람 쐬러 갔었다면서 좀 한가해지면 보자고 전화를 끊었다. 운주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와불과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 무엇이 그녀를 우주 끝으로 밀어냈는지…. 얼마 뒤 그녀의 부고를 들었다.
부고를 들었을 때는 하얗게 머리가 비워져 충격이었다. 가파른 내리닫이길 앞에 선 친구 손을 잡아 주지 못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풍족했지만 자기애는 서툴렀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한 가슴에 어설픈 미장질로 내리닫이 급경사길을 내, 마음을 내몰았다. 기복 심한 가슴을 통째로 드러내며 할퀴는 그녀가 버거워 내치기도 했다. 그것이 이제는 모두 빚이 되어 나를 할퀸다.
그녀가 떠났다. 한 계절이 가고 또 가고 한 계절은 내가 보냈다. 땅을 끄는 바람이 길을 쓸어 새겨진 발자국을 지운다. 세상의 물상들은 내 마음의 헐거운 문을 열고 자유로이 들어온다. 의심 없는 의존으로 손을 잡아보지만 덜컹거리며 불화하고, 감정의 프레임을 한 공간에만 고정되지 못하게 흔든다. 내가 두드리는 난타는 쓸쓸한 신명이 되어 세상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난해한 방정식이 된다. 그렇게 쿨럭거리며 흔들고 지나가면, 내 폐도 숨이 가빠 쿨럭쿨럭 힘이 든다. 깜빡 잊고 있었거나 실수로 잘못된 것처럼, 허물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 헛되이 쓴 정성도 시간도 미련 갖지 말고 자르자, 새로 생긴 주름 사이로 사연 많은 만월이 떠오르고 호기심이 돋는다. 이러면서 생기를 얻고 생기를 만들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인가.
세상에 남긴 바람도, 떠나는 사유도 그녀는 묵비권으로 닫았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바람 탄 연처럼 소문은 세상을 떠돌았다. 조금씩 친구를 이해할 것 같다. 내가 흔들리듯이 그녀도 흔들렸을 테고 가끔은 세상도 흔들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겐 무조건적으로 손잡아 줄 누군가가 없었다. 자신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는 따뜻한 손이 그녀를 다독거려 주었다면 지금쯤 툴툴거리고 삐죽거리고 하면서 이 봄을 맞이했을 것이다. 회한이 매섭게 가슴속을 훑어 내린다.
화순의 돌들은 불성을 가졌고 운주사 쪽을 향해 발돋움을 하고 있다. 정갈한 가슴으로 마음을 닦아서 내 심성이 단출해지면 허심 없이 다시 오고 싶었다. 오늘이 그날이다. 나는 그녀와 동행했다. 그녀를 가슴에 담고 운주사 주변 탑과 불상을 둘러봤다. 신록이 예쁜 오월에 그녀는 고운 색감으로 되살아나 한나절 애잔하게 내 손을 잡고 세상 나들이를 했다. 짧은 봄날이 기울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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